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Nov 12. 2023

혼술과 부부싸움

집 앞에 작은 이자카야가 하나 있다. 숙성회를 전문으로 하는 곳인데 작고 깔끔한 가게에 맛도 괜찮고 메뉴구성도 좋아서 아저씨들보다 동네 엄마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탕도 맛있고 굴튀김도 맛있다는 맘카페 글을 보고 오며가며 침만 흘렸더랬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혼자 들어가서 제대로 즐기고 온 날이 있었다.


8월 쯤으로 기억하는데, 남편과 '대판' 싸웠다. 근 몇 년 동안 부부싸움이라고 해보질 않았는데,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건지 서로가 감정적으로 폭발해서 다퉜더랬다. 몇 일동안 둘이 말도 안하고 밥도 같이 안 먹고 아예 한 공간에 있지도 않고 얼굴도 마주보지 않았으니 꽤나 심각한 다툼이었다. 아이들이 눈치보느라 게임을 못할 정도로.


근 일주일을 냉랭하게 지내고 있다보니 화가 화를 부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냉전상태던 어느 날 퇴근 길, 정말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시고 들어갈까 싶어 걸어가고 있었는데 문득, '1인 숙성회'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 여기가 바로 거기구나. 맘카페 게시물을 보며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던 안주가 떠올라 바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아직 손님이 없었다. 혼자 앉을 수 있는 창가쪽에 자리잡고 서둘러 메뉴판을 펼쳤다. 1인 숙성회가 제일 먼저 보였다. 뒷면에 이름만으로도 마셔보고 싶은 사케 종류가 많았지만 가볍고 달달한 술이 마시고 싶었다. 1인 숙성회 한 접시와 별빛청하, 나를 위한 술과 안주를 시키고 가방에서 읽던 책을 꺼냈다. 천명관의 [고래]였다.


어두운 실내, 낮은 조명, 나만 앉은 1인 테이블에서 이야기가 지닌 힘을 농축시켜 발휘하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 눈으로 봐도 화려하고 선명한 색감의 숙성회가 차가운 술과 함께 나왔다. 쫄깃한 회 한 점에 탄산이 터지는 술 한 잔. 거기에 책을 곁들인 평일 저녁이라니. 뜻밖의 호사를 즐기다보니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뭐가 짜증나는지 아무 상관없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30분 정도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소설을 읽었다. 어느새 이야기는 1부가 끝나있었고, 술병도 비워져 있었다. 한 병 더 추가하고 천천히 회를 음미하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런건 기록으로 남겨야하니까. 그렇게 회 한 접시와 술 두병을 깨끗이 비우고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지금은 남편하고 왜 싸웠는지 잘 생각이 안난다. 몇 년 된 일도 아니고 겨우 몇 달 전, 8월의 일인데도 말이다. 도대체 무엇때문이었는지, 왜 그랬는지, 뭐가 문제였던건지 기억이 잘 안난다. 그냥 많이 화가 났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그때는 심각해서 남편과 싸웠고, 화가 났고, 말하기 싫었고 보기도 싫었다. 남편한테 물어보면 무슨 일이었는지 알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냥, 어느 날 사치스런 혼술을 했고, 행복했다, 정도만 기억하고 싶다. 어찌됐건 눈도 즐겁고 혀도 즐거웠던 기억. 엄청 맛있게, 행복하게 먹고 마신 기억으로 말이다.


아, 그래서 남편하고 어떻게 됐느냐고? 싸운건 가물가물한데 화해한건 기억이 난다. 부모의 삽질을 견디다 못한 두 아들의 적극적인 설득 덕분이었다.  '삼겹살 먹으러 가요, 삼겹살 먹고 싶어요, 같이 가서 먹어요.' 애교와 협박이 섞인 아들의 압박에 마지못해 엄마와 아빠는 아들 손에 끌려 단골 삼겹살 집에 갔고, 고기와 소맥을 먹으면서 풀었다........


그리고 이자카야에서 맛본 술과 숙성회의 맛을 잊지 못해, 다음에는 남편과 함께 둘이 갔다나 뭐라나... 1인 숙성회에 매운탕까지 시켜서 엄청 잘 먹고 왔다고 한다. 큼큼.  


작가의 이전글 세상 하찮은 티키타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