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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Nov 28. 2023

2023 김장 뒷담화

안여사(우리 친정 엄마)는 매년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김장을 하신다. 올해는 두 딸의 스케쥴을 고려해 12월 초 쯤에 하시겠다고 얘기하셔서 그러려니 했다. 토요일 저녁까지는.


지난 주말에 동생이 볼 일이 있어 친정 근처에 간 김에 저녁에 잠깐 들린다고 했다. 동생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게 뭐야!"하고 소리쳤고, 딱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째 딸이 맛있는거 들고 잠깐 들른다던데, 잡쉈어?"

"야야, 나 혼자 김장하려고 배추 절궈놨는데 딱 걸렸다."

"뭐? 김장? 다음 주에 한다더니? 아니아니, 혼자 하고 있었다고?"


그랬다.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니 바쁜 딸들 고생시키지 않고 쉬엄쉬엄 두 분이 하시겠다고 이미 김장모드에 돌입해계셨던거다. 팔순의 할매와 여든 넷의 할배 둘이서. 

"15포기 밖에 안 해. 일도 아니야. 신경쓰지 마. 너 할 일 해."

"아니, 이게 말이 돼! 할매할배 둘이 왜 이런데. 내일 갈테니까, 암 것도 하지 말고 계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게으르고 비루한 몸뚱이라 김장 같은 고강도 노동을 하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하는데, 갑작스럽게 일하게 생겼다고 생각한 순간. 아차, 내일 결혼기념일이지! 근사한 곳을 예약한 건 아니지만, 나름 가족 외식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러고보면 안여사는 항상 내 결혼기념일 즈음에 김장을 하곤했다. 어느 해인가는 집(친정)에 와서 택배로 시킨 절인 배추를 받아다 놓으라고 했고, 또 어느 해인가는 와서 소금에 절구고 있는 배추를 뒤집어 놓으라고 했다. 결혼기념일에 세상 촌스런 아줌마 복장을 하고 시뻘건 김치 양념 투성이가 되어서 수육과 굴을 김치에 싸먹은게 몇 번이던가. 그래, 올해라고 뭐 별다를라고. 결혼기념일에 친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막걸리와 김치 먹으면 최고지. 그런 마음으로 일요일에 작은 아들만 데리고 남편과 함께 친정에 갔다. 


여동생은 몸살로 드러누워 올해 김장은 엄마와 둘이 해야했다. 150포기도 아니고 50포기도 아니고 꼴랑 15포기. 김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김장이었다. 게다가 이미 노인네 둘이서 사부작 사부작 씻고 다듬고 썰어놔서 내가 힘쓸 일이 거의 없었다. 시키는대로 양념 버무리고 시키는대로 집어넣고 시키는대로 옮기고 시키는대로 버무려 통에 담는게 다였다. 시키는대로 했다고는 하지만 스스로도 일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일을 찾아서 하기 때문인데, 사이사이 정리하고 씻고 치우고 쓸고 닦으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동안 6학년 작은 아들은 할아버지오 함께 나가서 붕어빵과 자기 먹을 간식을 사와서는 할머니 입에 하나 넣어드리고 할아버지랑 사이놓게 나누어 먹었다. 옆에서 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그렇게 나이드신 부모님 곁에 내 자식이 같이 있으니 절로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데 앉아서 버무릴때 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허리 뒷 부분이 뻐근했던거다. 15포기를 혼자 하긴했지만 평소 김장 양에 비해 무리가 가거나 고되지 않았는데, 자세가 안 좋았나보다. 마치고 일어날 때쯤엔 꼬리뼈에 통증이 오더니 통을 들어 김치냉장고에 넣지 못할 정도가 됐다. 작은 아들이 들어서 넣어주고 뒷정리를 도와주는데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허리 숙이고 펴는게 자연스럽지 못했다. 말도 안했는데 욕실 청소와 큰 설거지는 남편이 해줬다. 어찌저찌 마치고 저녁까지 잘 먹고 마무리 한 뒤 오늘의 품삯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괜찮을까 싶었는데, 왠걸 몸을 움직이기 힘들만큼 아팠다. 출근하자마자 병조퇴를 쓰고 정형외과부터 찾았다. 당장에 벌떡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이름의 병원이었다. (검색하면 전국에 하나 나온다.) 병원에 가니 당연히 엑스레이를 찍었고, 김장하고 무리해서 아프다고 말했는데 의사는 3일 후에 차도가 없으면 mri 찍자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물리치료도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간단한 물리치료는 처음 받아봤다. 침을 맞을걸. 속으로 엄청 후회하면서 약을 타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품삯으로 받아온 고기 남은거랑 김치를 내어주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유튜브로 '백년허리', '귀하신 몸', '명의', '척추'등으로 검색해서 주구장창 허리와 척추관련 영상만 봤다. 침대에 녹아들듯 누워만 있었는데도 시간은 잘도 흘렀다. 근육이완제와 소염제따위론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안 하던 일 했다고 몸이 투정 좀 부리나보다. 사흘은 고생할 생각해야지.' 마음은 그리 먹어도 허리가 아프니 생활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자고 나면 괜찮아지길 바라며 잠을 청했다. 누워서 핸드폰게임 좀 하고 웹툰도 좀 보고 그러다가.


다음 날도 여전히 강하게 자기 주장하는 허리 덕에 기린세수를 했다. 다리를 옆으로 최대한 벌리고 허리와 고개를 세우고 만해 한용운 선생처럼 꼿꼿이 씼었다. 마이너스에 가까운 시력 탓에 얼굴을 화장대에 바싹 붙여야 얼굴에 뭐라도 그릴 수 있는데, 척추요골이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며 방해를 했다. 어쩔 수 없이 거울에 손을 대고 체중을 분산하며 대충 변신을 끝냈다. 호러영화처럼 거울 가득 내 손자국을 남기며. 


이렇게 올해도 김장이라 쓰고 사랑이라 읽는 행사를 끝냈다. 아프다고 걱정해주기는커녕 복부비만탓이니 살을 빼라는 가족형제들의 구박과 질타가 이어져도, 아이들과 허리 숙여 인사하는 대신 고개만 까딱이는 거만한 인사를 나눠도, 버스 손잡이를 잡고 한 칸씩 오르고내려도, 재채기인지 앓는 소린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신음을 내며 무릎을 휘청여도, 그저 감사하다. 올 한해도 부모님 건강하시고 같이 만들어 다음 일년을 풍성히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23년도 김장 뒷담화는 감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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