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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07. 2023

삼겹살과 만보기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어제, 퇴근하자마자 두 아들에게만 간단하게 밥을 차려줬다. 

그냥 볶음밥에 그냥 지단을 덮어놓았지만 오므라이스라고 우기는 자기주장이 강한 오므라이스가 메뉴였다. 남편은 떡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 


"당신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서운해 하는 남편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를 주었다. 

"집에 있는 밑반찬이랑 김치찌개 데워서 밥이랑 먹을래? 나가서 삼겹살 먹고 올래?"

말로는 고민된다고 했지만 이미 입꼬리는 올라가있는 남의 편. 

"아 어쩔 수 없네."

하더니 당연히 삼겹살과 소맥을 선택한다.


"엄마랑 아빠 술 한 잔 하고 올게."

그렇게 둘이 세상 쿨하게 집을 나서 찾아간 곳은 집 앞 삼겹살 집. 여기는 맥주와 소주가 겨우 '2,000원'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끝내주는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경쟁 삼겹살집을 제치고 동네 1위 삼겹살 집으로 등극한 이유가 있다. 


이 주류 할인 정책 때문에 나 역시 술 따라 삼겹살 취향을 바꿨다. 갈치속젓과 명이나물과 파김치와 맛난 냉면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게 만드는 가격이다. 여담이지만 이 가게의 성공 이후로 옆 동네까지 주류할인 이벤트를 여는 곳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났다. 아름다운 영향력이다. 그렇게 생삼겹 3인분에 맥주 두 병,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적당히 마셔서 그런가 알딸딸하지 않고 사알짝 기부니가 좋았다. 


배는 무거워졌지만 기분은 한 결 가볍게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네이버 만보기에 걸음수를 적립하려고 일부러 조금 먼 길을 택했다. 몇 백걸음 밖에 안되더라도 목표한 걸음 수를 채우려면 더 걸어야 했다.


이틀 전 처음으로 네이버 만보기 이벤트에 접속했다. 걸음만큼 네이버페이를 준다고했던가, 일단 뭐라도 준다고 하니 무작정 접속해서 매일 6천 걸음 걷겠다고 설정했다. 


첫 날 성공했고 이제 둘째 날. 술 마시고 집에 와 확인해보니 5,400걸음이었다. 아쉽다. 오늘 목표까지 살짝 모자란다. 안되겠다 싶어서 침대에 누운 채로 핸드폰을 흔들었다. 다시 나가서 걷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날은 춥고, 몸은 나른하고, 이미 옷도 다 갈아입었고, 조금만 더 걸으면 되고, 그리고 나는 게으르니까. 그렇게 누워서 왼 손으로 한 번, 오른 손으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흔들었다. 흔들었다. 분명 흔들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이 되었다. 


눈이 떠지면서 의식의 스위치가 켜졌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는 충전기에 꽂아 놓지도 않은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설마, 설마, 설마?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열었다. 이미 어제가 되어버린 12월 6일. 걸음수는 5천...하고 622. 


그랬다. 누워서 핸드폰을 흔들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6000을 마저 채우지 못하고 쓰러져 잠들었다. 취해서인가 배불러서인가, 그대로 잠든 것보다 목표한 걸음수를 채우지 못한 것이 더 마음에 안 든다. (어째서?)그대로 욕실로 직행하고 12월 7일을 시작했다. 


어제 저녁 이후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영영 사라져버렸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은 밀도높고 충실하게 보냈다.(심지어 짬짬이 이 글도 쓰고 있다!) 현재 내 걸음수는 4,571 걸음. 운동장에 나가 겨울눈을 관찰하고 교무실에 다녀오고, 교실 한 바퀴 돌아 청소하고 연구실 다녀오고, 다른 층 다른 학년 선생님과 협의하고 이러고 빨빨대고 돌아다녔더니 이 정도를 걸었다. 이만하면 오늘 6000걸음은 무난하겠지. 


이거 걷는다고 무슨 운동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서서 움직이는 거니 괜찮지 않을까 싶어 마음의 위안을 삼아본다. (열심히 걷고 네이버 페이 도전!)

술만 적당히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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