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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10. 2023

MBTI-그렇구나와 그러려니

주말 밤, 돼지갈비 잘 먹고 드는 생각

어제 저녁도 외식이었다. 토요일 하루를 녹아버린 마시멜로처럼 늘어져보냈으니 당연히 저녁밥을 차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해도 되겠지만 내가 뱀파이어라도 되는 양 해아래 늘어져 잘 동안 남편이 모든 집안 일을 마무리 해놓은 상태였다. 찔렸다. 그래, 먹고 싶은데 어쩌겠어. 수요일엔 삼겹살, 토요일엔 돼지갈비지.


그렇게 집 앞 돼지갈비 집으로 향했다. 아....여기는 또 이벤트로 테이블 당 소주 1병이 무료고 고기를 시키면 된장찌개가 아니라 선지국을 한 대접씩 준다........그래, 먹자, 마시자! 


소주와 맥주를 황금 비율로 섞고 돼지갈비가 숯불에 구워지는 동안 고추마늘상추깻잎 먹고 잡채도 샐러드도 양념게장도 명이나물도 콩나물파무침도 먹었다. 드디어 고기가 익고 냉면에 얹어 한 점씩 씹었다. 아, 내가 이러려고 돈을 벌지. 공깃밥 두 개째 시켜 고기랑 먹는 큰 아들을 보면서도 행복하고, 소맥제조달인이 된 남편을 보면서도 행복하다. 작은 아들이 음료수 사달라고 칭얼거리는 것도 이뻐 죽겠다. 술이 또, 술술 들어갔다. 그렇게 넷이서 잘 먹고 잘 마시고 고기냄새 잔뜩 묻힌 채 집에 돌아와 쇼파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여보오, 연세대 심리학 교수가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썼는데,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일을 뭐라고 그랬게?"

"글쎄"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거를 같이 먹는 거래."

내 얼굴을 내가 보진 못했지만 분명 이 말을 할 때 나는 매우 뿌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을 거다. 내가 느낀 포만감 만큼 남편도 행복하다는 대답을 기다렸다. 오늘도 행복한 한 쌍의 돼지가 됩시다. 꿀꿀.


하지만 잊고 있었다. 우리 남편에게 공감능력은 약에 쓰려고 찾는 개똥만큼도 없다는 것을. 그야말로 '그건 니 생각이고'를 제대로 시전한다. "그 사람은 그게 중요한가보지."


아니, 여보세요. 그래요, 그 사람은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요. 옳아요 옳습니다, 옳은데 아무튼 나는 그 말에 매우 공감하고 지금 그렇게 아주 행복한 상태라고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거잖아요, 지금 뽀인트는 내가 행복하다, 왜냐, 지극히 소중한 당신과 함께 맛있는 걸 먹어서다, 라고 말하는거잖아요, 내 말의 핵심을 못 찾겠나요? 


내면의 무수한 절규들을 속으로 삼키고 차분히 말했다.

"당신이랑 맛있는거 먹어서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얘기야. 당신은 지금 안 행복하신가?"

"어, 나도 행복해."


- 무슨 사람이 사막에서 살다 왔나, 이렇게 건조해? 그러니 피부가 극건성도 아니고 악건성이지. 몸 속에 수분이라곤 오줌밖에 없을 사람이야, 피눈물이 없어, 없어. 속으로 꿍얼거렸다. 


옆에서 작은 아들이 "아빠 T야."라고 웃으며 말했다. 일종의 밈이다. 


MBTI로 따지면 나는 극F고 남편은 극T다. 그렇지만 나는 MBTI를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해석의 한 가지 틀로써 유용한 어떤 견해를 준다는 점에서는 수긍하는 면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기엔 인간은 훨씬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박진영의 말처럼 스스로가 평가하는 결과에 대해 신뢰하기 어렵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는 순작용보다 부작용이 더 커보인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사회적 관계를 확장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더 많이 쓰는 것 처럼 보여서다. 


- 나는 무엇이니까 이게 당연해. 그러니 네가 나를 받아들여야 해.  


이건 이해가 아니라 단절이다. MBTI를 처음 만든 사람도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로 쓰이길 바랐지 자신에게 정당성부여의 용도(혹은 면죄부)로 쓰라는 건 아니었을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와 남편이 합동인 두 개의 원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남편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감정에 수긍해줄 때 행복감을 지속된다는 걸 남편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사막같은 남편아, 호수가 만들라는게 아니라 그저, 물 한 바가지 퍼주시오. 

그 유명한 마법의 단어 있잖소. "그렇구나."  

괜히 자기는 T라서 그렇다고 말하지 말고 그 말할 시간에 '그렇구나'를 말하는 연습을 해보시구랴. 나도 '그러려니'하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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