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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15. 2023

자화상을 그리는 일

옆 동네에서 평일 저녁 시간에 현대미술을 이해하고 체험해보는 6회기 문화프로그램이 열렸다. 문화예술생태도시를 표방하는 시에서 주관하는 사업으로 작가의 작품을 나의 삶으로 가져와서 해석하고 직접 그려보는 수업이었다.


인터넷에서 모집 페이지에 써있는 화가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기회인데 직접 그려보는 것도 할 수 있는 수업이라니. 바로 신청했다. 화가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재해석 해볼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평일 저녁, 일주일에 한 번 퇴근하고 바로 달려가서 7시부터 두 시간 반 동안 12명이 만나 함께 그림을 그렸다. 처음 만나는 화가, 처음 보는 그림, 처음 써는 도구들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완전히 몰입했다. 물감과 붓이 만나 얇은 캔버스 위를 지나가는 경험, 연필고 형태를 잡아가는 경험, 내 그림과 다른 이의 그림을 긍정하는 경험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열심히 그렸다. 다른 일정과 겹치는 날이 있어 6번 다 참여하기 어려웠지만 무사히 세 개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된 그림은 당연하게도 만족스럽지만은 않았다. 아쉽고 모자라는 점도 있지만, 그리는 동안 완벽히 집중할 수 있었고 과정 또한 매우 즐거웠어서 뿌듯한 마음으로 내 그림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오브제를 조르조 모란디처럼 그려보는 일은 새롭고 흥미로웠다. 모란디와 그의 그림들에 대해 배우고 나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정물들을 모란디처럼 표현해보는 수업이었다. 내가 선택한 몇몇 오브제로 가족을 떠올리며 구도를 잡고 스케치했을 때는 이런 색감의 그림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모란디처럼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원하는 색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회귀를 보고 자신의 내면과 현실 세계 사이의 충돌을 표현하기였다. 시간에 메여있지만 책을 통한 자유를 꿈꾸는 내면을 아크릴로 그려보았다. 그라데이션과 스텐실 기법으로 표현해보는 과정이 어려웠지만,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탐색의 과정같아서 붓질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하지만 급한 성격이라 천천히 그리거나 전체를 생각하고 그리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다. 빨리 완성하고픈 조급함, 설계도면을 살피기 전에 완성된 집을 향해 달려가는 성급한 내 성정이 그리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언제쯤 나무가 아니라 숲을 생각할 수 있을까.

세 번째로 그린 자화상이 가장 어려웠다. 인물화를 처음 그려봤다는 점도 있지만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일 자체가 괴롭고 힘들었다. 차라리 나를 상징하는 오브제를 가지고 자화상을 표현할까 시도도 해보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찬찬히 작은 눈, 동그란 코, 주름 진 눈가와 입가, 온 얼굴에 가득한 선들과 흉터, 작은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얼굴이 이렇게 생겼던가. 이게 지금의 나인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그대로를 담담하게 그리고 싶어졌다. 인생의 반을 지낸 나이에, 내 모습을 내가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게 두 시간 동안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며 그림을 완성했다. 50대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이 작업을 포기했을 것이다. 나를 긍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서 어떻게 자기 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거부하고 외면하고 싶었던 추하고 모자란 것들까지 다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를 그릴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비오는 12월의 어느 저녁에, 이제사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 중년이 고요히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그야말로 '이제와 거울 앞에선 누님'이 된 기분이다. 나를 잘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어둡게 그려졌다.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어두운 사람인가보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얼굴이라는 생각에 어색하다가도 아름다움 대신에 깃들기 시작한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된다. 비록 남편과 아들은 모델이 커서 그림도 크다, 물감이 많이 들었겠다, 주름이 많이 생략됐다는 일침을 날렸지만, 나는 만족한다. 그린 사람이 만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인생 첫 인물화가 자화상이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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