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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23. 2023

생일, 다음 날

이제 정말 다른 핑계를 댈 수 없이 꽉 채운 50이다. 몇 살인지 따지지 않고 산 지 오래되어 네이버에서 나익계산기를 검색해서 정확하게 따져봤다. 진짜로 50이다. 어제로 나는 오십 살이 되었다. 그렇다, 어제가 내 생일이었다.


생일 2주 전부터 나는 두 아들에게 요구했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파충류도 알아들 수 있게.

"엄마는 선물 이런 거 하나도 필요없어. 그냥 아들들이 써주는 편지, 그거면 돼. 알았지? 편지. 유니는 그림도 같이 그려서 편지랑 주고, 주니는 편지만 써도 돼. 대신 너는 길게 써야 돼."


아, 차라리 선물을 사지, 편지는 못 쓰겠어요.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쓰는 지도 몰라요.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 마라, 초등학교 1학년 부터 국어 교육과정에 편지가 들어있다. 편지의 형식도 배우고 마음을 전하는 글쓰기도 배운다.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서 써라.


아들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편지쓰기를 미션으로 주어주고 2주 간 거의 매일 잊어버리지 않게 요구사항을 밝혀왔다. 심지어 생일 전 날은 출장과 도서관 행사 참여로 10시 30분 넘어 귀가예정이라 남편에게 저녁 먹고 꼭 편지쓰기 시키라도 당부까지 했다. 편지쓸 시간은 충분했다.


그렇게 목요일이 지나고 금요일, 게다가 불금! 오늘은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에 가서 저녁과 술을 먹을 생각에 들떴다. 출근을 했고, 퇴근을 했다. 집에 들어와 목도리를 벗으며 외쳤다. "오늘은 고기 먹으러 가자!", "엄마, 저 유도 갈 시간이라 안돼요." 다 벗지도 못한 목도리를 손에 쥐고 플랜 B를 제시했다. "그럼, 아구찜 시켜 먹을까?"

말이 플랜B지 이미 마음에 금이 갔다. 잠시 후 남편이 들어왔다. 자신만만하게 미역국을 끓여주겠다면서 고기를 찾는다.

"가서 사와. 술도 같이."

"그냥 집에 있는 불고기용 고기 넣고 끓여도 되지 않아? 나가기 귀찮은데."

"알았어 그럼 미역국은 담에 먹어. 있는 거 챙겨서 먹자."

여기서 두 번째 금가는 소리가 들렸다. '쩡'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두 아들이 쭈뼛거리며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일본에서 사온, 여름 반딧불이와 수묵화 느낌의 일러스트가 예뻐서 몇 년동안이나 서랍에 넣어두고 아끼고 있던 내 카드다. 나가서 생일카드 하나 사올 정성도 보이지 않고 그냥 집에 있던 거 아무거나 꺼내서 썼다. 펼쳐서 읽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님.....'어버이날도 아닌데, 온통 낳느라 수고했다는 말만 써있다. 그래, 아직 어려서 그럴 수 있지. 큰아들의 편지를 펼쳤다. '어머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고, 어머님과 함께 한 모든 순간에...어쩌고저쩌고...'

눈은 그대로인데 입꼬리만 올리고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이 편지는 뭐야? 진정성이 1도 없네?"

해맑게 대답한다는 말이....

"어, 편지 쓰는게 너무 어려워서 기도문이랑 찬양 가사를 바꿔서 써봤어."

아, 그래서 천지의 주 어머님의 사랑, 이딴 말이 들어가 있었구나. '쩌저적' 참고 있던 마음에 또 금이 갔다.

내 표정을 본 남편이 엄마 삐졌다고 알아서 잘하라고 경고방송을 했다. 뭐라고? 삐져? 온 집안에 정정보도를 해야했다. 일종의 재난대피경고방송이다.

"아니, 난 삐진게 아니라, 실망한거야.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을 하나도 담지 않은 편지를 이렇게 성의없이 써서 선물이라고 주는 아들에 대해서!"


생일을 특별한 날이라 생각한 적 없다. 생일이라고 특별한 이벤트나 서프라이즈를 바랐던 적도 없고, 어릴 때부터 생일파티를 한다거나 친구들과 만나서 논 적도 없다. 생일은 단지 생일이었고, 외려 친정엄마에게 감사하다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선물을 받아 본 적도 손에 꼽는다. 그런데 갑자기 생일타령을 한 이유는 그 핑계로 아들과 다정한 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아들, 엄마와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쉽지 않은 아들만 키우는 엄마로서 생일이니 해달라고 요구해도 괜찮을 수 있으니까. 편지라는 물질이 아니라 그 안에 든  마음을 느끼고 싶었던거다.


평소에 잘하면 된다지만, 그러면 세상에 모든 기념일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게 되는게 아닐까. 보통의 날과 다를 것 없지만, 그래도 한 번쯤 더 생각해보는 의미가 있으니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있는거다. 이런 마음을 아들들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엄마가 서프라이즈 안 해줘서 삐졌다고만 생각하는 듯 하다.


서운해 하던 내가 애잔했는지, 아니면 무덤덤하게 살았던 자신의 모자관계가 아쉬움을 남겨서인지, 두 아들에게 남편이 엄마에게 잘 하라고 한 마디를 해줬다. 그렇게 22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남편이 내게 미역국을 끓여줬다. 미역을 너무 많이 넣어서 쓴 맛이 났고, 고기는 정말 딱 한 줌 들어가 있는데, 냄비를 가득채운 미역 사이로 투박하게 썰린 양파가 둥둥 떠 있었다. 맛을 봤다. 생전 처음먹어보는 미역국이었다. 달았고, 살짝 썼고, 오묘했지만, 맛있었다. 진짜로 맛있었다. 마치 오십번 째 내 생일같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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