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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Feb 17. 2021

뒤뚱거리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

어릴 때 세살 밑의 동생과 함께 피아노 학원을 몇 달 다녔다. 동생은 재능이 있다고 계속 보내라는 원장님의 칭찬을 받으며 체르니 숫자를 줄여나갔다. 반면에 반복되는 연습이 지겨워 대충 치다 학원비 아까운 줄도 모르고 빼먹곤 하던 불량원생이 바로 나였다. 결국 나는 바이엘 상하권을 때는 순간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고, 동생은 피아노 치는 사진이 피아노 학원 홍보지에 실릴 정도로 실력을 키우며 열심히 다녔다. 그렇다고 동생이 음악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40이 넘은 지금도 취미로 악보를 초견하고 바로 칠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은 된다. 


이후 손가락을 내 의지대로 움직여 음을 만들어 내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내 불성실함과 꾸준하지 못함을 원망하며 피아노에 대한 로망만큼 커다란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피아노는, 지금까지 살면서 후회하는 일 중 첫 손가락을 꼽는 일이 되어버렸다. (둘째는 운전 못하는 거고, 셋째는 쌍커풀 수술을 안 한 일이다)     


이런 내가 작년에 전자피아노를 구입했다. 집 안에 피아노 곡 한 곡 제대로 칠 줄 아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부터 덜컥 사버린 것이다. 지금은 작년에 산 물건 중 가장 만족스럽게 잘 산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두 아들 모두 피아노 학원도 안다니고 제대로 배워보지도 않았는데 피아노라니. 사실 경제적 논리로 생각하면 이건 사치였다. 가격대 가격이고 제대로 칠 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옷걸이나 선반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그렇지만 드디어 우리 집에 피아노가 들어오던 날, 설치를 마치고 건반 뚜껑을 연 순간, 그 순간 내 마음에 퍼져나간 설렘! 호수 위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파문처럼 번져나가던 그 순간의 설렘을 뭐라고 표현하지 못하겠다. 피아노도 못 치면서, 마냥 피아노 잘 치는 아이들, 집에 피아노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만 했던 어린 시절도 생각나며, 꿈을 이룬 것만 같았다.      


단지 피아노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 주말에 서점에서 초보용 피아노 악보집을 세 권 샀다. 어린이 재즈, 동요, CCM. 왼 손으로 도솔미솔 반주를 넣어 곰 세 마리 정도만 칠 줄 아는 수준에 어울릴 것으로 쉽고 쉬운 걸을 골라 사서 거의 매일 30분 정도 씩 쳤다. 아이들은 유튜브 서핑으로 좋아하는 게임 배경음악을 찾아서 비슷하게 뚱땅거리면서 놀았다. 참으로 비싼 장난감이다. 그래도 작년 같은 코로나를 생각하면 잠시나마 핸드폰 화면을 벗어나서 피아노라도 동당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특히 소리에 민감한 작은 아이가 집중해서 놀 수 있는 놀잇감이 되어주었다. 제대로 배워 피아노를 쳐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 코로나가 종식되면 학원에서 배워보는 날도 올 것 같다. 기본적인 음계만 익혀 쳐보기만 해도 아이는 만족할 테고, 그렇게 혼자 독학하다보면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그렇담 큰 아이에게는 기타를 한 번 들이밀어 볼까싶다.     


사실 나야말로 뒤늦게 피아노 학원이라도 다니며 소나티네 한 번 쳐보고 싶긴 했지만, 성인 레슨비가 더 비싸서 엄두를 못 냈다. 요가도 해야 하고(지금은 못하지만) 식물도 돌봐야 하고, 앵무새도 챙기고, 이렇게 가끔 글도 쓰고 책 읽고 노는 시간 말고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도 있다. 그래, 결국은 덜 절실한 거다. 내가 택견을 배워보고 싶은 거나 피아노를 쳐보고 싶은 거나 지금 당장 내 살림과 생존에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보니 항상 후순위로 밀리는 거겠지.      


그래도 노년의 꿈을 얘기할 때 마당 있는 집에서 찾아오는 손주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가끔 피아노도 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삶의 여유와 낭만을 간직한 할머니, 자유롭고 자애로운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겁다. 어찌 보면 얼마 남지 않은 거고, 어찌 보면 아직 기회도 시간도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 내 나이. 상상속의 할머니가 되기 이해 뒤뚱거리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혼자 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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