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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an 08. 2024

실패한 완전범죄

'큰일났다. 이걸 어쩌지?'

깊은 밤, 모두들 자고 있는 어두운 방에서 소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해야했다.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후 벗은 옷은 보이지 않게 치웠다. 자, 이제 어떡한다? 소녀는 자기 옆에서 자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번개처럼 어떤 계획이 떠올랐다. 그래, 이 방법이야. 유니는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조심스레 여자의 등을 밀었다. 입술이 일자로 다물리고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응..."

잠시 뒤척이던 여자는 몸을 돌려 소녀가 방금 일어난 바로 그 자리에 누웠다! 다행이었다. 소녀는 여자가 비켜난 자리, 아직 여자의 체온이 남은 자리에 조용히 누워 몸을 바르게 하고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소녀의 작은 심장이 다시 규칙적으로 뛰이기 시작할 즈음, 넓은 방안에는 고른 숨소리들로 가득 찼다.



추석, 아니면 설날이었다.

민족의 대명절이었고, 부모 곁을 떠나 살던 자식들이 자신의 자식을 데리고 부모를 보러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중에 나와 내 아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는 시댁에서 대식구 뒷수발 들며 명절을 보내는 것이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렸던 나는 마냥 좋았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 아빠, 작은 아빠, 작은 고모와 숙모들도 그리웠고 고만고만한 사촌들과 노는 것도 즐거웠다. 맛난 먹거리와 용돈도 물론 좋았고.

여느 해처럼 추석을 맞아 모인 대식구들은 할아버지 댁 안방 가득 이불을 깔고 모여서 잤다. 작은 방에서 부모님과 같이 자도 되지만 좋아하는 고모와 사촌들 옆에서 같이 자고 싶었다. 제일 안쪽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먼저 누우시고 그 옆에서부터 차례대로 고모들, 나, 사촌동생들이 조로록 누워잤다. 조그많게 수다를 떨고 어이없는 흰소리들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비밀스럽게 나누다 잠이 들었다.


안방에 궤종시계가 몇 시를 가리키고 있었을까? 다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깊이 잠든 나를 깨웠다. 뭐지, 왜 축축하지? 눈을 뜨지도 못하고 더듬더듬 이불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이불이, 젖어있었다. '헉, 뭐야! 나 오줌싼거야?' 잠이 확 달아났다. 저녁에 식혜를 많이 마셔서 그랬을까? 대여섯살 아기도 아니고 초등학생 언니가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쌌다! 옆에 동생들과 온 친지들이 다 모여있는데! 당황하고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다음 날 친척들에게 놀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수치스럽고 걱정이 됐다.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다. 작은 방에서 자고 있는 부모님을 깨울 수는 없었다. 그때,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고모가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감쪽같은 계획이 떠올랐다. 얼른 젖은 옷을 벗고 새 속옷과 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고모를 내가 누워있던 자리, 젖은 이불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고모가 누워있던 자리로 쏙 들어갔다. 완벽했다. 안심해서였을까, 곧 잠이 들었고 오래지 않아 아침이 되었다.  


눈을 뜨니 다들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마루로 나가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고, 어른들은 부엌에서 분주히 아침준비를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고모를 보며 눈치껏 일어났다. 슬그머니 마루로 나가려는데, "유니야." 고모가 불렀다. 고모가 손으로 방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여기 와서 앉아보라고 말했다. 나는 주춤주춤 무릎으로 걸어가 고모옆에 얌전히 앉았다. 고모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을 열었다.

"있잖아, 고모가 일어나보니까 이불이 젖어있는거야. 그런데 고모 옷은 안 젖어있거든. 혹시싶어서 물어보는데, 네가 자가다 오줌쌌니?"

아, 비록 계획범죄를 저질렀지만 내게는 양심이 있었고, 남에게 뒤집어씌울 정도로 교활했지만 거짓을 꾸며댈만큼 악랄하지는 않았다. 고개가 절로 수그려지고 온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귀끝까지 뜨거워지는 것이 분명 새빨개졌을터였다. 나는, 순순히 자백했다.

"네......"

벨기에 브뤼셀에 있다는 오줌싸개 동상


아마도 고모는 웃음을 터트렸던것 같다.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다, 내가 아침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너는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 요 깜찍한 것 등등의 말을 퍼부으며 고모는 내 코를 쥐어뜯었다. KBS 주말드라마 속의 한 장면 처럼 말이다. 실컷 나를 골려먹운 고모는 나를 안아준 뒤 이불을 둘둘 싸서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했다. 다행히 동생들에게는 얘기를 흘리지 않나 체면을 지켰으나 아침 내내 온 식구들에게 내 만행을 떠벌렸다. 엄마와 아빠도 웃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웃으셨다. 오죽이나 부끄러웠으면 사랑하는 고모에게 뒤집어 씌울 생각을 다 했겠냐고. 아무튼 이렇게 내 인생 최초의 사기행각은 들통났고,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때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 이 글은 브런치북 연재글인데 아침에 발행하면서 매거진을 잘못 선택했다는 걸, 지금 알았습니다. 일단 발행취소를 한 후 다시 연재글로 발행했습니다. 읽어주신 감사한 구독자님, 라이킷을 눌러주신 소중한 구독자님, 특히 댓글주신 램즈이어 작가님과 유미래 작가님께 너무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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