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언제라도 나는 너를
카페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캐롤이 흐르고 있었다. 혁과 무진은 구석진 곳에서 서로의 노트북을 펼쳐놓고 두 잔째 커피를 마시며 세 시간이 넘도록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둘은 연이은 투고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봄에 있을 공모전을 준비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덕분에 혁은 끊었던 담배에 다시 손을 댔고, 이전보다 더한 헤비 스모커가 되어 버렸다. 참다못해 다시 한 번 담배를 쥐고 일어서려는데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네.”
카페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한 참 바라보며 무진이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혁의 눈앞으로 폭설이 내린 깊은 산 속에 외로이 서있는 여자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를 묘한 분위기의 여자. 혁이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진아, 설녀(雪女) 어때?”
“설녀?”
“냉정하고 인간미 없는 얼음여왕 같은 여형사가 주인공인데 사실은 진짜 설녀인 설정으로 간단한 연작 단편을 써보자.”
“차가운 여형사 이미지, 좋지. 괜찮을 것 같아.”
“거기에 파트너로 신입형사를 붙이면 어울리겠지?”
“어, 그것도 좋겠네.”
“잠깐만, 그런데 설녀라면 일본 요괴잖아, 아무래도 대한민국에 설녀는 좀 말이 안 되겠지? 내가 요즘 라이트 노벨을 너무 많이 봤나, 아, 모르겠다.”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고 자신이 비판하더니, 결국 혁은 테이블 위에 이마를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등과 어깨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크게 호흡하는 동안 혁의 머리 위로 작은 그림자가 졌다. 무진이었다. 혁에게 가까이 다가가 혁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이야기를 건넸다.
“혁아, 차라리 흡혈귀가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홈즈 같은 이성적인 여형사와 사실은 흡혈귀인 왓슨 페어.”
갑자기 등 뒤에서 한기가 온몸으로 흘러내렸다. 차가운 테이블에 닿은 이마보다 심장이 더 차게 식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무진의 얼굴은 평소처럼 싱글대던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처음 만난 날처럼 날카롭고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위화감, 이 낯섦. 도대체 이게 뭘까? 알 수 없는 불쾌감에 뱃속이 뒤틀릴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쥐며 혁이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괜찮아? 왜, 배가 아파?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걱정하는 무진의 얼굴엔 조금 전까지 보이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하다고 느껴질 미소가 가득했다.
“어, 그거 진짜 괜찮은데? 옛날에 뱀파이어 검사는 드라마에서 봤는데, 경찰이 흡혈귀나. 그것도 사수 말고 신입이 사실은 흡혈귀라는 거지? 평소엔 힘을 숨기고 있다가 위험한 순간에 발휘하는 건 어때? 스토리만 짜놓으면 웹툰도 가능할 것 같은데...... 오케이, 바로 시작하자. 일단 시놉이랑 로그라인부터 짜볼게.”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혁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 꼼짝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가운 종업원의 눈치에 무진이 다른 음료로 골고루 세 잔을 시킬 동안 내내. 그렇게 겨우내 완성한 뒤에야 둘의 이름으로 온라인 장르문학 플랫폼 정식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다.
***
잊고 있었는데, 오늘 무진에게선 그 날 카페에서 느꼈던 기묘한 분위기가 온 몸에서 흘렀다. 혁은 무진과의 관계에서 설명하기 힘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느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무언가.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불명확해지는 것 같아 최근에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 또 다시 같은 느낌이 혁을 사로잡았다. 그 느낌, 복부가 무언가로 꽉 찬듯하면서 묘하게 출렁거리는 느낌. 혁은 다시 한 번 배를 감싸 쥐었다.
“혁아, 너 또 혼자 엉뚱한 생각했지?”
“어, 아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라서. 들어볼래? 성별전환이나 젠더갈등에 대한 얘기를 넣어서 남자가 임신하는 설정이야. 일단 자료조사부터 해보자. 비켜 봐. 해외 논문이나 사례들도 찾아보면 나올 거 같거든.”
혁은 무진을 밀어내고 노트북 앞에서 빠르게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왠지 자신이 무진에게 느끼는 이 기묘한 감정을 무진에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까 커피 마시고 속이 좀 쓰렸는지 위가 좀 꼬였었나봐. 그때 갑자기 태아가 뱃속에서 꿈틀거리면 이런 느낌일까? 남자인 자신이 태동을 느낀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 남자의 임신체험을 가상현실에서 겪는 이야기로 앤솔로지를 만들면 괜찮을 것 같더라고. 그러면, 호러나 스릴러가 재밌을 것 같고, 당연히 SF적인 요소가 들어가야겠지? 아무래도 오랜만에 대학원 선배들하고 술 한 잔 해야겠다. 범수한테 연락한 지 오래됐는데, 이 참에 한 번 다 같이 보자고 할까. 아, 범수 기억나지? 내가 지난번에 얘기했던 친구 말이야.......”
혁은 자신의 안쪽에서 번지는 의문, 혹은 의심, 아니면 대상을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무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키보드 위를 오가는 손가락보다 더 빠르게 의미 없는 말들을 뱉어냈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아서. 빨리 다른 것들로 자신을 가득 채워야할 것 같았다.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던 불안감을 급히 치워버린 뒤 혁은 노트북 화면에 차례로 떠오르는 검색결과들에 눈을 돌렸다. 빨리 집중해야 이 불쾌하고 음습한 느낌이 사라질 것 같았다. 검색어를 넣고 새로운 이야깃거리에 집중했다.
몰두하고 있는 혁의 뒤에 서 있던 무진의 한 쪽 입 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것은 손 안에 든 먹이를 바라보는 포식자의 여유 있는 미소였다. 언제 잡아먹을 지를 가늠하며 장난하듯 발버둥치는 모습을 바라보는 맹수의 미소. 무진은 잠시 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혁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혁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다정하고 느른하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해. 끝나면 연락하고.”
몸을 돌린 무진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그치자 사무실 안에는 눈처럼 고요히 침묵이 내려앉았다. 배달 오토바이가 날카롭게 공기를 찢으며 등장하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