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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Apr 01. 2024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로또

지난 금요일, 팔순을 넘긴 아버지와 저녁을 먹으며 술 한 잔을 했다. 그 연세에도 회와 매운탕을 곁들여 소주 한 잔을 하시다니, 참으로 건강한 양반이시다. 동생이 사온 제철이라는 도다리는 쫄깃하고 고소했고, 엄마가 끓여준 매운탕은 깊은 맛이 가득했으며, 내가 준비한 술은 달았다.


한 잔 두 잔 술을 드시던 아버지가 요즘 기력이 약해졌다면서 오죽하면 며칠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다고 이야기를 꺼내셨다. 듣다말고 동생과 내가 동시에 외쳤다.


"아빠, 로또 사셔야지!"


로또 당첨자들이 제일 많이 꾸는 꿈이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오는 꿈이라지않던가. 마침 금요일 밤, 아직 늦지 않았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아버지 표정이 마뜩찮았다.

"로또는 무슨."

하시더니 소주를 한 잔 쭉 들이키셨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얘기는 이랬다. 십삼년 전,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석 달쯤 지났는데, 꿈에 할아버지가 나오셨더란다. 그러면서 무슨 숫자를 불러주시는데, 귀가 잘 안들리시는 내 아버지가 꿈에서 "아버지, 뭐라구요? 다시 말씀해주세요"를 반복해서 겨우 숫자 몇 개를 들으셨단다. 꿈이지만 이건 로또다, 라는 확신이 드셔서 필사적으로 기억하려고 애쓰셨고 그 때부터 그 숫자로 로또를 매주 사셨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러니까 십삼 년 동안을 매주.


깜빡 하고 안 샀던 주말에는 혹시라도 그 주에 당첨숫자가 당신이 매주 사던 그 숫자일까봐 엄청 불안해 하셨다고한다.  정말로 진심이셨던거다. 아버지가 로또를 사셨다는 것도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들었는데 심지어 매주 사셨다니.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여기까지 비밀을 털어놓으신 아버지는 "4등만 어번 되고, 번도 제대로 맞은 적이 없어"하고는 부끄러운듯 허허 웃으신다.


"아이고, 할아버지는 알려주실 거면 제대로 알려주시지 어쩜 그러셨대?"

동생과 나는 약간은 어이없고, 늙은 아버지가 귀엽게 느껴져서 깔깔대고 웃으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맛난 안주보다 더 맛깔스런 아버지의 숨겨진 비밀 덕분에 술이 술술 들어갔다.


이 다음에, 아주아주 한참 지나서, 어느 날 내 꿈에도 아버지가 나오시려나. 내게도 숫자를 일러주시려나. 그러면 나도 아버지처럼 로또를 살테다. 숫자가 맞지 않아도, 매번 입맛을 다셔도, 이 밤의 술자리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며 한 장씩 사 모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로또는 일확천금의 꿈이 아니라 더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었을테니까.



이런 책을 사드렸어야하나.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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