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김경미 시인의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첫 장에 실린 시부터 빵 터졌다.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돌아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지나간 옛 연애를 말하는 이 귀여운 허영이 시집에 대해 밝은 인상을 줬다. 그래서인지 이어지는 시들도 편하게 읽었다. 난해하지 않고 쉽게 이해되는 시어와 시인이 바라보거나 겪고 있는 상황들이 공감이 되어 간만에 시를 읽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었다.
-결심은 베이커리처럼-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를 잘 아는 건 나의 결심들
중략-
신선한 베이커리 빵집처럼
언제나 당일 아침에 만들어서
당일 밤에 폐기하는
결심들만큼
영원히 나를 잘 모르는 것도 없다
시집 곳곳에서 보이는 블랙유머와 자학, 다정함과 외로움 사이에 서린 수줍은 언어들에 깊이 공감했다. 게다가 마지막에 실린 시는 마치 나를 포함한 글을 쓰고자 하는 지망생들 모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덕분에 처음 시는 웃으며 읽었고, 마지막 시는 읽고 나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