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점으로 혼자 라면을 끓여먹었다. 사실은 어젯밤부터 라면이 먹고 싶었는데 참았다. 일어나도 계속 라면이 생각나서 혼자라도 먹겠다면 신나게 물을 올려 라면 한 봉을 끓였다.
역시나 한강이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한강 라면. 친정 식구들은 아무도 내가 끓인 라면을 먹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아예 라면을 못끓이게 한다. 정말 이상하게 내가 끓인 라면은 맛이 없다. 잘 알지만, 나 혼자 있는데 누구한테 끓여달랠수도 없고해서 어쩔 수 없이 끓였다. 역시는 역시. 한강라면이 됐다. 국물에서 라면 맛이 안 느껴진다. 어젯밤 내내 떠올렸던 라면의 맛은 이게 아니었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그래서 면을 다 먹고 밥도 한 주걱 듬뿍 넣고 말아 먹을 수 있었다. 국물 한 방울도 안 남겼다. 나는 다 생각이 있었다.
2.
어쩌다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멍하니 거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슬슬 기온이 오르고 있는 시간. 도로에는 줄지어선 차들이 멈춰있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공기와 더 뜨거울 도로, 움직이지 않는 차들과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휴일 이른 아침 거리. 낯설고 비현실적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순간, 신호가 바뀌었는지 차들이 전진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경적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나는 몸을 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3.
남편은 모기에 잘 물린다. 같이 있으면, 나는 안 물리는데 남편은 꼭 물린다. 아무래도 남편한테는 모기들이 좋아하는 피가 흐르는 게 분명하다. 모기의 총애를 받는 남자라고 종종 놀리지만, 남편 옆에 있어으면 남편한테로 모기가 몰리니 방패막이로 삼는다. 흔치않은 남편의 유용한 점이다.
오늘 산책중에도 남편은 자기를 계속 공격하는 모기를 쫒아댔고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승리감에 취해 걸었더랬다. 유쾌하게 산책을 마치고 집에 와서 씻고 나왔는데, 이곳저곳이 간지러웠다. 아무생각 없이 팔다리 여기저기를 긁었더니 빨갛고 불룩하게 올라온 부분이 눈에 보였다. 이럴수가, 모기가 나를 물었다.
그랬다, 남편만 물리는게 아니었다. 예민한 남편은 모기가 침을 찔러넣는 순간 알아채고 반응한거고, 나는 모기가 앉아서 피를 다 빨아먹고 가도 모르고 안 물린줄 알았던 거다. 둔해서 물리고 있는 것도 못 느끼는 둔탱이, 언제 물린지 모르는 둔탱이. 그게 나였다.
4.
게으르게 퍼져지내느라 방학동안 건강검진을 못했다. 버티고 버티다 개학 전 날 병원에 들러 토요일로 검진을 예약했더랬다.
위내시경만 하니 금식이나 준비할 것도 따로 없이 그냥 아침에 일어나 챙겨서 병원으로 갔다. 몇 가지 형식적인 검사, 몇몇 엑스레이 촬영을 마치고 잠시 대기한 후 위내시경을 했다. 엄청나게 쓴 구강 마취제를 삼키고 모로 침대에 누웠다. 비수면으로 신청한 이유는 내가 직접 보고 싶어서였는데, 이 병원에서는 모니터를 환자가 볼 수 없게 되어있었다. 6년 쯤 전, 이사오기 전에 했던 병원은 의사가 보여주면서 설명도 해줬었다. 목에 이물감과 구역감을 느끼면서도 내 식도와 위장을 들여다보며 긴장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었다.
의사가 들어오고 바로 내시경을 집어넣었다. 내 눈앞에서 움직이는 내시경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관이 훨씬 굵었다. 아주 가느다란 관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새끼손가락 정도 굵기였다. 순간의 감상도 잠시, 곧바로 차가운 금속이 식도를 지나 위안으로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트림과 헛구역질이 동시에 나오고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쑥쑥 기계적인 손놀림이 이어지고 코로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라는 간호사의 안내가 들렸다.
다행인지 2분도 안되어 내시경이 종료되었다. 금방 끝나서 좋지만 너무 대충하는건 아닌가 싶기되 했다. 구석구석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아도 다 아는걸까? 깨끗하다고 말만하고 끝이었다. 위암 가족력이 있고 재작년에는 헬리코박터균 치료도 해서 긴장했는데, 내심 서운했다. 수면으로 하면 꼼꼼하게 더 살펴보는 건지 궁금했다.
사실 진짜 걱정되는 건 비만과 내분비계 문제다. 비만과 음주때문에 혈압이나 고지혈, 당뇨 등등으로 걱정스런 진단이 나올게 분명하다. 문진하면서도 전혀 운동을 안하는 생활습관과 음주습관을 체크하며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래서 괜히 검진을 미뤘던건가 싶었다. 진짜 이제는 운동도 좀 하고 술도 줄이고 체중관리 건강관리 좀 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병원을 나섰다.
양산을 펴고 한 걸음 걷자마자 병원 1층에 있는 스타벅스가 보였다. 병원에서는 40분 후에 죽을 먹으라고 했지만, 무슨 말씀. 일단 아.아 부터 들이부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원한 커피와 케익도 한 조각 먹으니, 조금전까지 건강때문에 걱정하던 마음이 싹 사라지고 당분이 만드는 도파민의 활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잘 먹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적당히 운동하자. 2학기는 그렇게 파이팅이다. 다짐하며 집까지 땀흘리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