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작은 아이가 키가 좀 자랐다. 또래보다 작고 마른 아이라 중1 이지만 아직 나보다 작았는데, 여름을 지나며 내 키를 따라잡더니 추석즈음에는 살짝 내 키를 넘었다.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어 내심 기쁘고 뿌듯했지만, 설마 나보다 힘도 세질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저녁 먹고 쇼파에서 유튜브를 보던 아이가 갑자기 나한테 팔씨름을 해보자고 했다. 아이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저 조그만 녀석이 조금 컸다고 엄마를 이겨먹으려고 드는구나 싶어서 제대로 눌러주려고 작정하고 건너편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코웃음치며 손을 맞잡고 팔씨름을 시작했는데, 왠걸, 시작하자마자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며 내 팔이 넘어갔다. 아이도 설마 엄마를 이길거라고는 예상 못한 표정으로 어리둥절해했다. 소리를 지른건 승자인 작은 애가 아니라 패자인 나였다.
"말도 안돼!! 내가 졌다고? 왠일이야!!!"
방심했다, 아들이 반칙했다, 자세가 안 좋았다, 핑계대며 다시 시합하자하기에는 물리적인 우열이 분명했다.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형, 형, 나와 봐, 내가 엄마 이겼다!"
한 박자 늦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아들과, 믿을 수 없는 패배에 충격받은 엄마의 희비가 교차했다. 이럴때만 남의 편이 아니라 내 편인 남편을 불렀다. 새 토스터기를 사려고 온라인쇼핑몰을 뒤지던 남편이 핸드폰을 놓고 등판했다.
"준아, 아빠하고 한 번 붙어볼까?"
어이없어하며 큰아들이 나왔고, 오십을 넘긴 반백의 아빠가 아직은 자기가 이긴다고 자신하며 자세를 잡았다. 옆에서 구경하는 작은 아이는 신이 났지만 나는 곧 끝날 승부의 방향을 예감하고 미리 안쓰러운 표정을 준비했다. 거미줄 만큼의 긴장과 멋쩍은 웃음이 흘렀다. "시작!" 비장한 목소리로 내가 시작을 외치자마자 남편의 팔은 부들거리더니 나처럼 바로 넘어갔다. 남편은 스툴위에 철푸덕 엎어졌고 큰 아들은 힘도 제대로 안 쓴 표정으로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고고히 일어섰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아니, 내가 이만큼 키운거지.
아들에게 엄마가 키워준거니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생색내며 가을 팔씨름대회를 끝냈다. 남편은 가볍게 팔을 흔들고는 열어놓은 결재창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갑자기 힘을 줘서 놀란 팔에 근육통연고를 발라야했다.
생각해보면 지는 게 당연한건데, 어째서 오십이 넘은 엄마아빠가 한창 자라는 아들을 이길거라고 생각했을까?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오른쪽 팔이 욱씬거린다. 어깨와 목까지 불편하다. 팔이 위로 올리면 통증이 느껴지는데도, 슬쩍 웃음이 나왔다. 다 자란 아들들이 뿌듯해서 한 번 웃고, 약해져가는 스스로의 육신이 애잔해서 한 번 더 웃었다.
오래 전 유대인들은 과거가 앞에 있고 미래가 뒤에 있다고 여겼다고 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를 재현하려 하며 지난 날의 유산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노인이 되는 것도 축복이라 여겼다. 의료수준이 낮아 장수 자체가 힘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노인들이 점차 과거 조상과 같은 지혜와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사회적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과거지향 세계관이라니, 시간이 미래를 향해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세계관과 정반대다. 과거를 쌓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현대 세계에서는 나이듦도 극복하거나 치료해야하는 무엇으로 여겨진다. 온갖 안티에이징, 저속노화등의 책과 이론 등등 노화를 늦추기 위해 애쓰는 사회다. 이 사회에서 나 역시 천천히 늙어간다. 뜨겁게 돌아가던 엔진이 서서히 식어가고, 금이 간 그릇에서 조금씩 물이 세듯 기운이 빠지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쇠락을 서글퍼하기에는 미래지향적인 현대인에게도 나이듦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글이 그렇다. 내가 예전에 썼던 글들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지금 잘 써서가 아니라 예전에 너무 못 써서. 나이들어가며 쇠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가. 천천히 식어가는 덕분에 삶이 지닌 온도의 미세한 변화를 풍성하게 느끼게 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