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우리.
아직 피지 않은 어린 꽃봉오리나, 몸 안에 생기는 혹 같은 덩어리.
열 두어살 무렵 처음 몽우리란 말을 들었다. 가슴에 열감이 느껴지고 만지면 아팠다. 살이 오른 것 같이 가슴이 조금씩 봉긋해지려할 때, 엄마가 몽우리가 잡힌다 말했다. 몽우리. 어딘가 어색하고 낯선 이 단어를 그때의 나는 작고 비밀스럽게 기억한다. 몽우리에선 몽정이나 월경같은 단어들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옛적 조상들은 아직 여물지 않은 작은 덩어리들을 다 몽우리라고 불렀을까? 그러니 어여쁜 꽃봉오리를 몽우리라고 불렀겠지. 그런데 왜 몸 안에 난 알지 못하는 것들, 건강이 나빠질 징조를 보이는 것들에게 여린꽃봉오리와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을까? 고약하고 괘씸한 제일 안쪽 어금니에게 '사랑니'라고 다정한 이름 붙인 정서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과 비밀이 담긴 몽우리는 오십이 넘어서는 지금은 피해야할 단어가 되었다. 이 나이에 가슴에 몽우리가 잡히면 암인거고, 림프나 몸 어딘가에 몽우리가 생기면 제거해야한다. 지금도 내 몸 속 어딘가에 작은 것들이 뭉쳐서 굳어가고 있일지도모른다. 문득, 대장에 생기는 용종도 몽우리라 불러도 되려나 궁금해졌다.
앤드류 포터의 단편소설 [첼로]에는 건강이상으로 연주할 수 없게 된 첼리스트가 등장한다. 남편의 눈으로 병이 진행됨에 따라 아내가 보이는 변화를 매우 담담하게 그려내는 소설 끝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짧은 한 문장이 읽는 순간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어떤 투병기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생생한 표현이었다. 육신의 고통을 겪을 때, 몸이 불편해서 병원을 찾을 때, 질병의 침략을 받았을 때 겪는 마음의 충격을 이렇게 선명하게 나타내다니. 소설의 분위기에도 취했지만 문장 하나에도 취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몽우리는 내 몸이 나를 배반한 증거일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언젠가 소녀시절 이후 다시 내 몸 어딘가에 몽우리가 생긴다면 어찌해야하려나. 내 몸에서 피어난 몽우리를 꽃처럼 어여삐 여기고 다독여야할지, 배신당한 증거이니 돌아보지말고 매몰차게 제거해야할 지, 닥치기 전까지는 못 정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