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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Nov 13. 2021

나는 벌레 사냥꾼이다

머릿니의 추억

 겨우 몇 십 년 전인 80년대 초반에는 집집마다 머릿니가 흔했다. 머릿니는 머리카락에 붙어살며 머리의 피부에서 피를 빨아먹고 사는 곤충이다. 당시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무렵이었는데, 학교에선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선생님이 지나다니시면서 머리를 들춰 머릿속에 이가 있나 없나를 검사 했다. 그 정도로 머릿니가 흔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무리 포니테일로 꽉 당겨 묶어도 그 틈으로 머릿니들이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머릿속에 이가 생기면 엄마는 금방 알아채셨다. 세 남매가 간지럽다며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모습을 보면 냉큼 약국에서 산 약으로 머리를 감겨주셨다. 열 손가락을 총 동원해서 두피가 벌개지도록 벅벅 감긴 다음에 옛날 할머니들이 머리카락 빗을 때 쓰시던 아주 가느다란 빗살의 참빗을 꺼내 드셨다. 바닥에 하얀색 달력을 한 장 뜯어 깔고, 그 위에서 쫙쫙 머리를 빗어 내리면 하얀 종이 위로 후두둑 까만 이가 떨어졌다. 여섯 개의 다리를 버둥대며 도망가려는 이들을 한 마리 씩 손톱으로 눌러 죽이는 엄마를 보면 외적을 무찌르는 장군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나도 엄마를 따라 호들갑을 떨며 달아나려는 이를 잡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참빗으로 빗어내리면 이는 잡을 수 있지만 머리카락에 붙은 알, ‘서캐’는 사라지지 않는다. 일일이 손으로 잡아 당겨 머리카락에서 뜯어내야한다. 잠자기 전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엄마는 머리카락을 이쪽저쪽으로 넘겨가며 내 머리에 붙은 서캐를 잡았다. 머리카락이 당겨져서 아플 때도 있었지만 엄마 무릎의 따뜻함, 편안한 손길, 넘어가는 머리카락의 사락거리는 느낌이 합쳐져 지저분한 머릿니 박멸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대로 잠에 빠져버린 적도 많았다. 지금도 누가 내 머리를 만지면 금방 잠이 들어버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줄줄이 삼남매라 밑에 두 동생들 머리에도 이가 생기면 엄마 혼자 세 아이를 챙기기 힘들어 큰 딸인 내가 동생들 머릿니를 잡아주게 되었다. 엄마 흉내 내어 동생머리를 내 무릎에 대고 머리카락을 쓸어가며 벌레를 잡기 시작했는데, 세상에! 인간은 분명 수렵 생활을 했던 게 분명하다. 내게도 숨겨진 사냥 본능이 잠들어 있었던 거다. 그 조그만 벌레의 알을 내 손으로 잡아 뽑을 때마다 짐승을 잡는데 성공한 사냥꾼의 희열을 느꼈다. 그때는 그저 열중해서 잡기만 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잡을 때마다 뿌듯함과 성취감, 그로인한 만족감을 느꼈던 거라는 걸 알겠다. 다시 느낄 수 없는 그 행복에 감사하며 내 손톱 밑에서 죽어간 무수히 많았던 머릿니들의 명복을 빈다.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사소하지만 은밀한 내 취향은 이후 좀처럼 드러날 일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당연한 듯이 머릿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신 겨울이 오면 보풀제거기를 꺼내 들고 니트 보풀을 뜯어내며 행복해 하고, 머리 감고 난 다음에 돌돌이 테이프로 바닥의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것을 즐기며, 베란다 가득 기르는 화초에 붙은 진딧물도 약을 쓰지 않고 손으로 하나씩 잡는다. 겉으로는 친환경적인 생활습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무언가를 잡는 재미 때문이다. 어쩌다 쌀통에 쌀벌레가 껴도 문제없다. 쌀을 씻으며 물에 뜨는 쌀벌레를 하나하나 잡아서 제거할 정도로 벌레 잡는데 특화된 시력을 갖고 있으니까. 여름 철 주방 싱크대에 날파리가 생기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한 마리씩 다 잡아 처치해버리겠어!”라고 말이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몰래 악당들을 처치하는 히어로들처럼 내 본능을 숨기고 오늘도 매서운 눈으로 사방에 숨은 벌레는 찾아내는 나는 ‘벌레사냥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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