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출근하며
1. 기름의 향기
“여자는 기름기가 있어야 예뻐요.”'
어느 프로그램에서 모델 한혜진이 한 말이었다. 지방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마른 몸매의 모델이 무슨 얘기인가했더니, 피부와 모발에 적당한 유분이 있어야 보기좋다는 말이었다. 맞다, 여자건 남자건 메마르고 퍼석한 피부나 머리카락보다는 살짝 윤기가 흘러야야 좋아보이지. 그때부터 머리를 말리면 끝부분에 오일을 살짝 발라 정돈하기 시작했다. 차분하고 단정하게. 아침에 많이 바쁘지 않으면.
오늘 아침,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교통봉사하시는 어르신이 다가오셨다. 매일 아침 눈인사를 나누지만 대화를 해본 건 처음이었다.
"향기가 엄청 좋으네, 화장품 뭐 쓰시나?"
"우리 딸이 나 쓰라고 화장품 꽤 주는데, 그건 이렇게 좋은 냄새가 안 나더라고. 아유 지나가는데 향기가 확 나서 기분이 좋아요. 뭘 쓰셨나?"
무슨 일인가 싶어 낯설어하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러셨어요, 아마 화장품은 아닐거고요. 머리 감고 나서 머리에 바른 오일에서 나는 냄새일거에요. 한 번 써보세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는 내 기분도 부드럽게 피어올랐다. 머리에 바른 오일 한 방울 덕분에 다른 사람에게 좋은 기분을 전해줄 수 있다니. 향기 이야기에 내가 칭찬받은 듯 좋은 마음으로 출근했다.
좋은 향은 백리를 가고 훌륭한 인품은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향기와 언어 모두 사람의 기분을 바꾸는 힘이 있다. 오늘은 헤어오일의 향기였지만, 다음에는 내 말과 행동으로 향기를 피워낼 수 있을까. 이 마음으로 오늘은 조금 더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며 시작하자고 다짐하며 교실 문을 열었다. 향기를 나누는 아침이었다.
2. 버스와 등불
버스에서 내려 막 걸어가는데 후다닥 횡단보도를 건너는 우리 반 아이가 보였다. 신호가 깜빡일 때 뛰면 안되는데. 순간 잔소리가 나올 뻔 했지만 참고 웃으며 인사한 후 먼저 교실로 들어왔다. 내 뒤를 따라 바로 들어올거라 생각한 아이는 한참 지나서 교실로 들어왔다. 친구랑 놀다 왔느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쑥스럽게 하는 말이, ‘출근하는 엄마가 버스 정류장에 서계셔서 엄마보고 오느라 늦었어요’였다.
그 얘기를 하면서 환하게 웃는데, 그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엄마에게 뛰어가는 5학년 아이의 발걸음은 얼마나 따뜻했을까?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애틋했을까? 뛰어가는 걸음걸음마다 환한 등불이 켜졌을 것만 같다. 버스를 기다리던 엄마에게 아이는 그 자체로 환한 등불이었겠지.
아이 말을 듣고 혼자 마음이 벅차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출근하는 엄마를 배웅하고 학교로 걸어오는 아이와, 아들의 배웅을 받고 손 흔들며 떠나는 엄마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그 다정한 짧은 만남이 엄마의 하루에 얼마나 힘이 될지 나는 안다. 내 안에도 서서히 행복이 스며들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할 다정함이었다.
3. 스커트와 출근
오늘은 살굿빛이 도는 샤스커트를 입고 출근했다. 작년에 사두고는 그간 한 번도 입지 않았다. 너무 뚱뚱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맞춰 입을 웃옷도 적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친 고학년 아이들 전용의 전투복장을 주로 입다보니 옷장 안에 넣어둔 채로 어영부영 계절을 놓쳐버렸다. 잘 안 입던 스타일이라 쑥스러운 마음도 컸다. 더위가 가시고 바람이 살랑부는 계절, 추워지기 전에 가을 분위기를 내보고 싶어 불쑥 용기를 내 보았다.
옷걸이에서 스커트를 꺼내 손으로 쓸어보았다. 까끌까끌하면서 차르르 떨어지는 천의 느낌이 생생했다. 입는 동안도 맨살에 닿는 감촉이 신선하게 느껴지더니, 걸을때마다 펄럭이는 특유의 촉감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스커트에 어울리는 베이지색 구두까지 신고 현관을 나서니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차르르하게 무릎 앞으로 퍼지는 스커트. 폴짝 하고 한 번 뛰어볼까? 한 바퀴 빙그르 돌아볼까? 설레는 마음에 슬며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출근이 싫을 때는 평소 안 입는 옷을 입는 것도 좋은 환기의 방법이 된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