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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쓰는가?

조지 오웰, 강원국, 은유의 글쓰기를 보며 생각해본다

by 피어라


조지 오웰은 그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이유로 ‘온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의 네 가지를 꼽았다. 그 중 첫 번째인 온전한 이기심은 이렇게 시작한다.


1. 온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거나 사후에 기억되고 싶거나 어렸을 때 자신을 막 대했던 어른들에게 앙갚음하고 싶다는 등등의 욕구, 이것이 동기,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것은 사기와 다름없다.
<조지오웰 디 에센셜/민음사/p634>

오웰에 따르면 나는 80%의 온전한 이기심과 20%의 역사적 충동 때문에 글을 쓴다. 그가 말하는 역사적 충동은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찾아내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망”이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큰 아이가 8개월 되었을 무렵이었다. 첫 아이를 키우는 많은 엄마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과 자라는 아이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다. 육아를 하며 있었던 일, 아이를 키우는 고단함에 대한 인정, 내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자랑 등이 뒤섞여 블로그에 초보엄마의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단순한 일기였지만 그 글을 통해 또래 엄마들과 이웃을 맺게 되고 소통하며 사랑 받고 싶은 욕구를 채울 수 있었다. 오웰이 말하는 글을 쓰는 이유 중 ‘온전한 이기심’에 가장 많이 공감하는 까닭이다.


아이가 크고 나서는 육아에 대한 것 보다 내가 느끼고 보고 듣는 것들에 관해 글로 나타내는 싶어졌다. 글을 통해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내 이야기로 공감 받고 싶은 욕구도 커졌다. 이런 욕구를 작가 강원국은 “관종”이라고 불렀다.


글 쓰는 사람은 태생이 ‘관종(관심종자)’이다. 이들은 글을 들고 독자 앞에 나선다.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나는 이것을 알고 있고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고 깨달았다’고 얘기한다.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이 나라고 외치는 것이 글쓰기다. 관심받기를 싫어한다면 왜 글을 쓰는가. 정치인과 언론인의 글은 말할 것도 없고, 문인과 과학자, 철학자, 연예인 할 것 없이 글을 쓰는 이유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비겁하다. 관심 끌기에 성공하지 못할까 봐 스스로 방어선을 치고 참호 안에 머리를 처박는 격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글로써 무엇인가를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이루고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적어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투명 인간으로 살기 싫어서다.
<오마이뉴스 특별기획 -강원국의 글쓰기1 중에서>

강원국의 ‘관종’과 오웰의 ‘온전한 이기심’은 같은 욕구를 의미한다. 두 작가의 말처럼 나는 관심을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서 글을 써왔다. 칭찬과 공감 받는 것으로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다. 아마 내 자신의 성장배경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밑으로 두 동생을 둔 장녀로 자라며 부모의 관심과 사랑에 부족함을 느껴왔던 성장기의 모습이 보다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내재된 욕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블로그나 브런치를 개설하여 내 글을 타인에게 내보이면서 조회수나 공감, 라이킷 수에 연연하고 댓글에 일희일비하는 지금 모습을 보면 두 작가의 견해가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실감하게 된다. 이전에는 이런 사적인 충동과 욕구가 부끄러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내가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멋진 무언가로 포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가들의 글을 읽고 나니 나 역시 ‘관종’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유 작가는 그의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서문에서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고 했다. 오웰식으로 해석하자면 그녀에게 있어 글쓰기는 ‘온전한 이기심’의 영역이자 동시에 ‘정치적 목적’의 영역이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또는 추구하는 사회의 유형에 관해서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망.’(조지오웰 디 에센셜/민음사/p635)은 내게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욕망이다. 나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거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첫 욕망이 되었던 아이의 성장과정을 함께하다보니 사회적인 변화에 대한 욕구가 생겼다. 모두에게 공정한 사회, 아이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 과오에 대한 분명한 처벌이 당연한 사회에 대한 바람이 생겼고 정치적인 발전에 대한 기대도 점차 커져갔다. 아이가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어가며 교육과 차별, 환경과 폭력, 역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마다 삶의 성찰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들에 답답해졌다. 들끓는 분노와 슬픔을 적절한 언어로 표출할 능력이 없어 차마 글로 적어보지는 못하고 가슴에 담아두어야 했다. 때로는 회피하거나 모른 척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외면해왔던 정치적 충동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피해왔던 현실에 비로소 마주할 용기가 생겨나는 것일까. 아직 세상을 향해 내 목소리로 말하는 정도는 못 되지만, 글 속에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어떤 이유로 글을 쓰는가? 어떤 순간에 글을 쓰고 싶은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답을 찾기 위해 지나간 삶의 궤적을 훑어보며 성장배경도 살펴보고 나를 움직이게 했던 원동력도 찾아본다. 나는 어떤 시간을 보냈고 무엇에 관심이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는가를 생각할 때, 오롯이 내 안의 ‘나’와 마주하게 된다. 모자란 글들이지만 쓰는 과정에서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글을 쓰는 시간은 내가 나를 보듬으며 안아주는 시간이 되었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나와 마주하는 일이고 나를 살피는 일이며 시선을 넓혀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것이 계속 글을 쓰고 싶은 이유,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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