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갈아엎기_우려먹기_울궈먹기_고쳐쓰기
어린 날, 아빠의 사업이 줄줄이 망한 덕에 엄마는 삼남매를 돌보며 생계를 꾸려 나가야했다. 사업을 접은 아빠가 일거리를 찾아 보름이나 한 달씩 지방을 다녀가는 사이 엄마는 시장에 가게를 열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일이 많으면 한밤중에 돌아오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 날에는 밑으로 세 살, 두 살 터울의 동생을 데리고 저녁을 차려 먹어야했다.
당시엔 집집마다 땅을 파서 김칫독을 묻어두고 그 김칫독에 김장김치를 보관했다. 마당이 없는 집 사람들은 그나마 가장 추운 곳을 골라 김치를 보관해야했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5층짜리 주공 아파트(지금의 LH) 사람들은 김칫독 대신에 작은 항아리에 김장김치를 넣어 계단참에 놔두고 꺼내먹었다. 저녁 무렵 계단을 올라 집에 가노라면 층마다 작은 바가지를 들고 나와 항아리에서 김치를 꺼내가는 엄마들을 볼 수 있었다. 층마다 다른 김치 냄새가 풍겨왔다. 어느 층은 강하고 비린 젖갈 향이 나고, 어느 층은 과일처럼 시원하고 달큰한 김치향이 났다. 김치들은 항아리 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것 같았다.
아마도 12월이나 1월 즈음, 김장이 끝나고 난 한 겨울이었을 거다. 어느 날이었을까, 기다려도 엄마가 오질 않고 배는 고픈데, 집에 반찬이 보이질 않았다. 김치라도 있으면 밥을 먹을 텐데. 어쩌나 고민하던 그때, 앞집 김치 항아리가 떠올랐다. 고민은 짧았다. 잠시 후 나는 한 손에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쥔 채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맨발로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조용히 항아리 뚜껑을 들어 옆으로 치워놓고, 비닐을 풀었다. 안에서 매콤한 김치 냄새가 확 끼쳤다. 팔꿈치까지 옷소매를 걷고 팔을 넣어 김치 한 쪽을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양념이 묻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최대한 원래처럼 수습한 뒤 후다닥 집으로 뛰어 들어 갔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 날 먹은 김치는 아삭하고 시원했다. 어린아이 입에도 정말로 맛있었다.
그 뒤로도 조그만 김치도둑의 도둑질은 몇 번 더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과감해져서 옆에 있는 작은 항아리를 휘저어 총각김치도 집어오고, 안 쪽으로 팔을 뻗어 양념이 잘 베인 배추를 골라 꺼내오기도 했다. 여전히 동생들은 내가 문밖을 나가 꺼내오는 김치의 정체를 몰랐다. 그저 잘 먹었다. 훔쳐온 김치는 맛있었지만 먹는 내내 얼굴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김치를 훔치러 가기 전에도, 훔치면서도 그랬다.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들킬까봐 마음 졸였다. 저녁에 옆집에서 문을 여는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우리 집으로 찾아올까 겁을 내기도 했다.
간 큰 김치도둑의 범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김치는 점점 맛이 들어갔고, 김치가 익을수록 앞집 항아리 속의 김치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저녁, 여기서 김치를 가져가면 없어진 티가 확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 뚜껑을 닫았고 더는 앞집 김치항아리 뚜껑을 몰래 열지 않았다. 김치도둑이 손을 씻은 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도 뒤늦은 양심의 활약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더 하면 위험하겠다는 약삭 빠른 계산의 결과였다. 그리고 어린 김치도둑은 자신의 잘못을 기억에서 덮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앞집 아주머니는 김치가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 같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하는 짓인데, 김치를 꺼내며 양념국물을 흘렸을 수도 있고 뚜껑이나 항아리에 고춧가루를 묻혔을 수도 있었을 거다. 살림하는 사람이 자기가 정리해뒀던 비닐이 다르게 풀어헤쳐져 있는 것을 못 알아챘을 리 없고, 아무리 어린 아이 손이라 해도 김치양이 줄어드는 것도 알았을 거다. 충분히 이상하다 생각했고 어느 정도 눈치채셨을 거라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알고도 눈감아주신 걸 거라고.
어릴 때 앞집 김치를 훔쳐 먹은 적이 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어린 날에 대한 자기연민이 더 해져 오래 묻어두고 살았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앞집 아주머니는 그때 그 김치도둑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까? 김치도둑의 정체를 눈감아 주셨던 아주머니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나도 아주머니처럼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어른,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어른이 되었다면 좋을텐데. 그 겨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배추 안에 양념을 채우듯 감사와 회개가 내 안에도 쌓여가고 우리 집 김치냉장고 안에서는 맛있게 김치가 익어간다.
2023. 12. 25일 올린 글을 2026년 2월 20일에 고쳐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