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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08. 2021

안여사를 소개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할머니

안여사는, 저 경북 성주와 구미 사이 어딘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안윤자 여사는,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할머니다. 소 여물 멕이고 논 일하는게  싫어서 산으로 도망쳐 다니며 놀다 저녁 무렵에야 들어가곤 했던 개구쟁이 소녀. 그 아이가  9살에 6.25전쟁을 온 몸으로 겪고도 살아 남아 올해로 70하고도 9년을 더 살았다. 벌써 내년이면 팔순이 된다.



줄줄이 팔남매 중 다섯째 딸이라 오빠와 남동생들은 중고등학교까지 잘도 가는데 자신은 국민학교 밖에 못 다녀 배움이 짧은 것을 평생 한으로 여긴다. 중학교를 안보내준다고 밥을 굶어가며 때를 썼지만 결국 중학교 문턱도 못 밟아봐 손주들에게 알파벳을 못 가르쳐주는걸 여적지 부끄러워한다.  


젊은 시절엔 서울로 상경해 동생들 데리고 기술을 배워 일하느라 서른 넘어서야 늦은 혼사를 치뤘다. 당시에는 서른이면 노초녀 중에 상노처녀였다. 다행이 잘생기고 학식있는 집안 남자를 만나 자신이 번 돈으로 아파트까지 사서 결혼했지만, 연이은 남편의 사업실패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평생 몸에 익힌 기술로 시장에 가게를 열고 머리 새하얀 할매가 된 지금도 자신이 번 돈으로 살고 있다.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투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아직까지 안 헤어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래도 젊은 시절엔 금슬은 좋았는지 딸 둘에 막내 아들까지 세 남매를 두었다.


자신이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은 콧구멍이 살짝 들려서 돈이 다 새나가는 관상이라 때문이라며 큰 딸의 납작한 코를 잡아 쥐어보던 안여사. 딸들의 귓불이 도톰하고 발등이 두둑해서 부자될 상이라며 좋아하곤 했다.



내가 고등학생, 밑으로 두 동생은 중3, 중1이던 때, 안여사는 아침마다 우리 세남매 도시락을 5개씩 싸야했다. 어느 날 등교준비로 정신없는데 안여사가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윤희야, 도시락 싸려고 밥통을 열었는데, 쌀알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엄말 쳐다본다. 미안해서 어쩌지?”

깜빡하고 밥솥 전원을 눌러놓지 않아 밥이 시간안에 안 되었던거다. 밥도 못 먹고 도시락도 못  싸 가게 되어 짜증이 났지만, 밥솥 뚜껑을 열었을 때 쌀알이 고대로 물에 잠겨서는 안여사를 바라보는 장면이 상상되어 나도 모르게 ‘풉’ 웃어버렸다.  안여사는 그처럼 당황스런 순간에도 허둥대지않고 웃음으로 넘기는 재치와 지혜를 지닌 사람이었다. 


야물딱지던 누나들에 비해 한참 늦되던 막내 남동생때문에 누나들이 화를 내면 “지렁이보고도 용봤다, 하는 법이다. 좋게좋게 봐줘라.”라고 말해주던 사람, 언제나 긍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뿐인가, 남동생과 싸울때는 다른 말 하짐 말고 "이 부자될 놈아!"하고 욕해주라고 당부하기도 하셨다.

겨울이면 새벽같이 학교가는 딸아이 발 시려울까봐 연탄불에 신발을 뎁혀서 현관앞에 놔주시던 다정한 엄마였다. 평생을 시장 바닥에서 돈을 벌었지만 남과 싸우거나 목소리 높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이 조곤조곤 얘기하는, 소녀같은 안여사.  


이제 나이들어 팔순이 머지않은 나이지만, 명절만 되면 양념게장, 갈비탕, 갈비찜, 더덕구이에 나물까지 널찍한 교자상에 빈 틈이 보이지 않게 한가득 음식을 하고 자식들 먹이려고 부지런히 움직이신다. 그런 엄마 덕에 나도 지금껏 자식들 먹여가며 살고 있는 거겠지. 엄마같은 위트와 근면함을 갖추진 못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사는 건, 다 엄마에게서 탯줄로 이어진 사랑 덕분일거다. 매일매일 직장과 가사일에 허둥대면서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엄마에 대한 기억들이 내가 힘을 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마음일때는 안여사한테 전화하면 안된다. 괜히 혼자 울먹울먹 할 수 있으니. 

할매의 세상 귀여운 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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