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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Dec 16. 2021

서향 창문을 바라보며


그 방은 서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답게 확장하지 않은 조그만 베란다가 있고 안쪽으로 촌스러운 색감의 분홍색 커튼이 달려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은 날이면 분홍 커튼이 지저분하게 날리곤 하던 방, 아침 해에게 등 돌린 채로 하루를 시작했던 그 작은 방은 결혼 전 나와 동생이 함께 쓰던 방이었다.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옷장이 있고 그 옆으로  책상과 책장 하나가 나란히 있었다. 반대편 벽에 둘이 같이 쓰던 화장대가 놓여 있고 바닥엔 딱 둘이 발 뻗고 누워 잘 수 있는 공간이 남았었다. 부모님은 질색하셨지만 바닥엔 거의 항상 이불을 펴두고 지냈다.


등받이 쿠션에 등을 기대고 이불 속에 들어가 앉아 책을 읽으면 방 바깥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방안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오후 네 시의 햇살이 온 방 안에 주황색을 펼쳐놓고 나면 천천히 하루의 시간들이 유영하며 내려앉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마른 바람 같은 햇살이 하루를 정리할 수 있게 주말 오후를 바꿔버리던 내 방. 그 시간이 지나면 낮과 밤이 바뀌는 경계가 천천히 흐려지고, 그럴때면 벽에서 등을 떼고 세운 무릎을 끌어안은 채 눈이 아프도록 빨갛게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노랗게, 때로 붉게, 때로 보랏빛으로 변하는 하늘과 그 빛이 가득한 내 방안에 혼자 있는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우면서 찰나의 불안정이 자아내는 미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그 순간에 스며드는 밤의 기운과 마지막 빛의 환영은 아무리 무의미한 하루를보냈더라도 충만해질 수 있을 만큼 높은 밀도를 지녔었다.


가끔 친정에 들른 날, 방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면 그 방에서 지내던 때가 생각난다. 해가 식어가는 순간의 향기가 퍼져나던 그 방은 지금은 친정아버지의 옷방이자 엄마의 성경 읽는 방이 되었다. 방의 구조며 가구며 벽지는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살던 20여년 전 모습은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했지만, 오후에 슬며시 들어오던 햇살만큼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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