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지 않은 지 제법 오래 되었다. 육아를 시작한 삼십대 부터 시를 잊어버렸다. 시집을 산 적도 까마득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오십을 앞둔 지금, 어쩌다보니 자꾸 시에 관한 책을 집어든다. 유유 출판사에서 나온 [시의 문장들]도 그렇게 만났다. 시 속의 구절들도 아름답고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도 가슴에 들어와서 손이 닿는 곳에 두고 한 번씩 펼쳐 조금씩 음미하며 읽고있다.
저자가 사랑하는 시 속의 구절들을 모아놓고 그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곁들여놓았는데, 첫 시 구절을 읽고는 울컥해서 시 전문을 바로 검색했고, 시인이 목격한 어느 저녁을 따라가다 그만 울어버렸다.
다행이라는 말
천양희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두부 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 넣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듯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 다행이다
추스리고 다음 시를 읽다가 이번에는 아는 시를 발견하고 내 책장에 먼지 쌓인 채 꽂혀있는 시집을 꺼내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읽다보니 내키는대로 느슨하게 한 장씩 읽게된다.
어제 마음에 들어온 시는 [모든 국은 어쩐지 괜히 슬프다]는 구절이 들어있는 시였다.
슬픈 국
김영승
모든 국은 어쩐지 괜히 슬프다
왜 슬프냐 하면 모른다 무조건
슬프다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너무 슬퍼서
고깃국은 발음도 못하겠다.
고깃국은......
봄이다. 고깃국이.
국없이 밥을 먹지 않던 아버지를 위해 평생동안 한 여름 무더위에도 세끼 꼬박 국을 끓여대시는 어머니와 밥과 반찬만으로도 힘에 부쳐 국 없는 상을 차린 엄마 덕에 이제는 아예 국을 안 먹는 내 아이. 국을 끓이기 위한 노력과 수고, 정성과 사랑을 떠올리며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 먹고 싶어졌다. 역시 국밥에 진심인 나라 국민이구나. 뜬금없이 웃었다가 국은 밥과 달리 정말 슬프구나, 그렇구나,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