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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 Aug 11. 2021

이민 현실, 첫 번째 난관은?



내가 말하는 이민의 첫 번째 난관은 바로 “타이밍”이다. 언어, 가족, 경력, 문화 차이 등 사람마다 중요시 여기는 요소에 따라 질문에 대해 다양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앞서 나열한 것 들 또한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아주 중대한 사항이다. 냉정히 말해서 언어에 능숙하고 부양가족의 문제도 으며, 직장 경력이 아무리 높고 그 나라 문화를 사랑하더라도 판단은 모두 자신이 내린 것이다. 아무리 잘난 들 이민을 성공하는 기로는 대사관에 달렸다. 물론 흔히 말하는 ‘사자 직업’은 여느 나라에서 데려가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이러한 전문직종은 한국에서도 잘 살아갈 사람들이다. 예외로 돈이 아주 많으면 이민의 과정이 대폭 간소해진다. 최근에 구글 창업자가 뉴질랜드에 약 80억 원 이상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투자 이민’이라고 하는 특별 비자를 발급받아 닫힌 국경과 무관하게 입국한 사례가 있었다. 이렇듯 투자 이민은 어떤 상황에도 무력화되지 않고 꾸준히 이민을 가능하게 한다.


보통 이민을 하려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한국이 싫어서’ 혹은 ‘자녀 교육을 위해’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극단적으로 ‘한국이 싫어서’라고 표현했지만 크게 보면 ‘더 나은 인생을 위해’ 결국 한국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겨우 스물세 살이었던 나이로는 그렇다 할 경력도 없거니와 투자 이민을 할 만큼의 큰돈은 당연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학 후 취업비자를 취득하여 몇 년간 경력을 쌓고 이민을 하는 보편적인 방법을 계획하던 찰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 비자로 뉴질랜드에 홀랑 정착하게 되었다.


영주권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결혼 비자로 왔다고 했을 때의 냉한 시선이나 뒷말을 받는 일이 여기 좁디좁은 한인사회에서 더러 생긴다고 한다.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과 같은 비교 선상에 놓이기도 무색할 만큼 그 과정이 얼마나 배로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유학이나 취업 비자로 인해 겪는 어려움을 통틀어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비자를 발급받기까지 꽤 애먹었지만, 타이밍이 좋아 코로나를 뚫고 뉴질랜드 이민을 할 수 있었던 과정을 풀어보려 한다.


뉴질랜드 이민 온 지 두 달하고 이틀 차, 비자 지옥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말은 즉, 비자를 신청한 지 두 달 채 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작년 2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이래로 어찌할 도리 없이 일 년 6개월 동안 뉴질랜드에 사는 남편과 생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 당시 뉴질랜드와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는 줄줄이 취소되었고 두 나라 모두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강경한 대응이 시작되었다. 늦겨울에 시작된 코로나여름이 되면 높은 기온에 바이러스가 살지 못해서 종식될 줄 알았던 사람들의 생각이 애석하게도 완전히 나갔다. 그렇게 그 해 여름, 남편이 한국에 나왔을 때 하려던 혼인신고를 할 시기조차 잃게 되었다. 내 왼 손에는 약혼반지만 덜렁 끼워진 채 남편과 나는 각자 뉴질랜드와 한국에 있어야만 했다.


모든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고 코로나 종식 선언을 한 뉴질랜드에 서러워할 때 즈음, 어느 블로그를 통해 희소식을 접했다. 뉴질랜드 국민의 직계 가족은 굳게 닫힌 국경에도 입국할 수 있도록 예외 비자를 발급해준다는 것이었다.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우리는 직계가족에 속하지 않았지만 뉴질랜드는 사실혼에 의거하여 부부 관계를 정의하는 나라였기에 어느 때 보다 큰 쾌재를 불렀다.


뉴질랜드 이민관으로부터 입국할 수 없다고 직접 들은 답변과는 다른 전개가 시작되었다. 비자 신청 전에 먼저 예외적으로 국경을 넘어가고자 하는 비자 신청 “기회권” 같은 것을 받아야 했다. 뉴질랜드 이민성에 우리의 절실한 사연을 적고 제출한 뒤 하늘에 계신 모든 신들에게 기도를 했다. 기도가 부족했는지 결과는 암담하게도 ‘거절’이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음 날 크리스마스라는 기쁨은 빼앗긴 채 실연 맞은 주인공보다 더 큰 절망에 빠졌다. 사실혼으로 보기에 부족하다는 뉴질랜드 이민성의 거절메일에 뼈를 맞고 며칠이나 정신을 놓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우리의 관계에 대해 노력하는 기미라도 보이자 해서 대충 써낸 게 덜컥 승인이 났다. 처음 단호한 거절을 받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아서였는지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는데 남편은 전화기 너머 울고 있었다. 기쁨과 감격의 눈물도 잠시 한국에서 밤을 꼬박 새워 장장 이 주라는 시간에 걸쳐 비자를 부랴부랴 완성했다. 다행히 나의 비자는 예외적으로 입국을 허용하는 “비지터 비자 (visitor visa)”라서 신청한 지 한 달 만에 승인을 알리는 메일을 받았다. 중간에 추가 서류 요청을 받기는 했지만 지난날 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한 마음고생에 비하면 그리 대수도 아니었다.



느낌표까지 달고온 비자 신청 기회권


유학원부터 뉴질랜드 이민성까지 우리의 사례로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다던 비극적인 소리는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같이 비자를 다룬 법무사조차 장담할 수 없지만 한 번 해보자던 케이스였다. 그때 당시 우리와 같은 상황의 비자가 대략 10,000건이 넘었고 그중 칠천 여건이 거절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신청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이밍이 좋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최근에는 국경 심사가 다시 굉장히 엄격해졌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저 운 좋게 덜 꽉 막힌 시기에 덜 깐깐한 심사관이 배정된 게 아니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비자를 발급받으면 뉴질랜드 국을 하기 전에 자가격리 호텔 시설을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또 한 번 긴장의 시간을 가질까 걱정부터 앞섰지만 비교적 여유로운 자리에 세 번씩이나 날짜를 조정하기도 했다. 행운의 신이 계속해서 우리를 도우려는 건지 예약하고 한 달이 지나자 올해 12월까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예약이 꽉 차서 사람들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하물며 티켓팅 사단이라도 난 듯 당사자 대신 시설을 예약해주는 사태까지 암암리에 벌어지면서 논란이 여지없이 발생했다.


오싹하고 다사다난했던 짧은 시간도 잠시 벌써 두 번째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이민을 하는 동안 나의 성장기는 비자와 함께 새로 시작한다. 지금은 비지터 비자의 신분으로 뉴질랜드 법적 주부로 지낸다면 이번에 신청할 비자는 워크비자로 머지않아 외국인 노동자가 될 것이다.


현재 뉴질랜드는 외국인에 대한 입국을 제한하며 자국민 보호에 앞서고 있다. 한국 지인들 사이에서 일 년 반 동안 떨어져 지내던 부부는 우리가 유일무이했지만 뉴질랜드에 오니 긴 여정을 끝내고 마침내 재회한 커플 투성이다. 걱정과 위로를 받아왔던 암울한 과거는 사라지고 나와 같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웃는 현재가 되었다. 비슷한 처지를 겪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지금도 블로그를 통해 연락이 오곤 한다.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져서 여차저차 비자를 발급받은 내가 조언해줄 수 있는 대답은 거의 없었다. 부디 잘 되기를 같이 바라 주기만 할 뿐이었다.


비교적 쉬운 결혼 비자로 이민을 시작했지만, 이민을 꿈꾸는 모두가 타이밍 좋게 한 방에 비자를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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