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인정
평일 밤 9시 동백은 분주합니다.
밀어 넣은 저녁밥이 식도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나온 배를 쓸어 모아 레깅스를 올려 입고, 숏슬리브에 윗살들을 불러 모아 끼워 넣고 , 결국엔 집업 재킷 하나로 내 몸의 2/3는 가려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가 그친 어젯밤 만보를 채우는 공원 산책과 함께 숲향을 누릴 생각에 힘들거나 귀찮지 않았습니다.
20층서 가뿐하게 탄 엘리베이터는 12층에서 멈춥니다.
온몸 퍼렁 트레이닝복의 같은 동 아저씨. 처음 보는 이웃이라 먼저 인사하기는 뻘쭘하고 끝까지 뻘쭘떨며 1층에서 내렸습니다.
몇 발짝 앞서간 퍼렁 이웃님.
공동 현관문이 열리기도 전에 입에서 천둥소리를 냅니다. 깜짝이야! 분명 어마어마한 천둥소리였습니다. 그 앞을 지나서 나도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방귀가 아님에 감사해야 하나.
쉬던 숨을 멈추고 빛의 속도로 나가고 싶었으나 75년생 낼모레 50의 다리 힘이 좋지 않은 동백은 전력질주에 한계를 느끼며 어쩔 수 없이 맡게 됩니다. 우아래 퍼렁님의 저녁 밥상 냄새를...
살다가 살다가 그렇게 엄청난 트림의 위력은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공포는 여러 가지가 있구나. 새롭게 또 알게 되었답니다.
똥 밟았다 생각하고 호수로 향하는 길. 우아래 퍼렁님. 네가 왜 거기 서 있어?
불길한 예감은 역시나 틀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코스로 산책을 하나 봅니다.
그래 내 땅 아니니 내 호수 아니니 그럴 수 있지. 횡단보도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찰나.
우리의 같은 동 아저씨.
저출산과 지구 열탕화의 큰 숙제를 풀기 위해서 매일 노력해도 하루가 부족할 판에 유엔 놀이와 가자미 놀이에 재미를 붙인 두 분을 찬양하며 그것도 부족한지 시골 동네 서점 주인까지 현란하게 비판하는 유튜브 방송을 스피커로 듣고 있지 뭡니까!
귀꾸녕이 막힌 건가. 나이가 90이신가. 암만 봐도 내 또래인데...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저런 이웃님이 살고 있었다니.
이 대목에서 또다시.. 하모니카 불며 산책하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횡단보도만 건너자. 건너고 이번에는 잠깐만 달려 진짜 거리차를 두자. 고 맘먹습니다.
양 종아리에 럭비공 하나씩을 심어 둔 것 같은 알다리 그 냥반도 갑자기 뜁니다. 들고 있던 휴대폰도 출렁거리며 진행자의 목소리도 요동치고. 아! 왜지?.. 지옥이 이럴까 짧게 생각했습니다.
사진 속의 저곳이 만보 코스 중 동백이 가장 좋아하는 지점으로 도착하면 일부러 느리게 걷습니다.
격자의 울타리도 예쁘고 고인 호수도 반짝반짝 뻥 뚫린 시야와 함께 바닥의 벽돌까지 애정합니다.
빠르게 걸어와 다소 격해진 걸음을 늦추고 이 길의 반쯤 걸어가는 찰나. 반대편에서는 아까 봤던 퍼렁과 알다리와 불빛 강렬하고 스피커 짱짱한 휴대폰의 아우라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와.. 오늘 완전 꽝이네. 빠르게 단념하고 스치는 퍼렁을 무시하며 나는 내 길을 갑니다.
그
런
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알다리는 다시 내 옆을 지나갑니다. 아마도 그 지점에서 턴을 한 모양입니다.
다시 온 힘을 모아 빨리 걷기로 간신히 앞질렀습니다. 한참이나 많이 앞질렀습니다.
집 앞에 도착할 무렵 우유와 사과를 사기 위해 문 닫기 직전의 노브랜드 매장에 들어갔습니다.
마감 시간이라 생선과 야채가 어찌나 바겐세일이던지. 이것저것 골라 결국에는 일회용 쓰레기봉투까지 구매해서 담고 나왔습니다.
터벅터벅 집 앞. 공동 현관문을 열고 오른쪽으로 꺾어 엘리베이터 앞. 떠억! 그가 있습니다.
여전히 스피커는 켜져 있는 상태로 위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동백...
- 아까 보니까 12층 사시던데 산책 다니시나 봐요.
- 네
- 너무 잘 아시겠지만 이곳은 입주민들이 모두 사용하는 공간이고 아까 그 호수공원도 여러 사람들이 다니는 곳인데 이어폰은 불편해서 안 하시는 거예요?
- 폰은 내 거잖아요.
- 물론 그렇죠. 그래도 좀 배려해 주세요. 저 솔직히 너무 불편했어요.
- 뭐가 불편해요? 왜 나만 배려해요.
.
.
- 들어가세요.. 12층
우아래 퍼렁 트레이닝 복 알다리 이웃님.
나 너 때문에 상당히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아무튼 인정합니다!
지니고 있는 무지함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