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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안댁 Oct 02. 2019

부엌이 주는 즐거움

나를 위로해주는 공간에 대하여

나는 첫 아이를 낳은지 20개월 된 워킹맘이다.


요즘의 일상을 묘사하자면 그야말로 무질서의 나날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최대 근사치가 아닐까 싶다. 나의 하루는 전날 감아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물로 휙휙 헹구고 곧장 물기를 털어내는 일로 시작한다. 옷을 차려입고 화장을 끝내는 건 10분이면 족하다. 아니, 것도 조마조마하다. 젖은 머리는 출근 길에 마르겠거니 부스스한 잔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돈하는 것으로 출근 준비는 어영부영 끝난다. 


평소 꾸미는 일에 시간을 크게 할애하지 않는 성격일뿐더러 출산한 뒤로 미용 항목은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똑 떨어져 나갔다. 스스로를 측은하게 여길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가 있으니 아침 준비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아이 돌보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만 앞설 뿐이었다. 나풀나풀거리는 파스텔 톤 스커트와 무엇과 믹스매치해도 안성맞춤인 플랫슈즈를 사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 기억이 언제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딱히 무언가 꾸미고 싶은 욕심이 나지는 않는다. 이렇게라도 정신없이 사는 일상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거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문을 열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현실로 들어서면 온전히 원하는대로, 가고 싶은대로, 먹고 싶은대로, 입고 싶은대로, 보고 싶은대로 기타 등등등의 자유로운 시간이 이따금씩 그리워진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마을버스로 5분 거리인 단골 케이크가게조차 마음껏 달려가지 못하는 현실이 이질적으로 다가와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남기고 등 돌린 현실의 무자비함이 나에게 죽방을 날렸다고나 할까. 


그 이후로 남편한테 아이를 맡기고 커피타임을 즐긴다던지 서점이나 영화관에서 개인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곤 했지만 휴식에는 유통기한이 있는 듯 했다. 달콤한 여유는 엄마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야하는 시간의 데드라인을 넘어서면 다시 육아의 굴레는 반복되었다.



부엌은 나의 온전한 안식처


육아를 동반하는 순간 야무지게 꾸려진 부엌 세간이나 평안하게 요리하는 시간을 상상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이가 세상에 등장한 뒤에야 깨달았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는 손에 물기 마를 새 없이 젖병과 용기를 삶고 닦는 과정이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아이가 이유식을 시작하고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고부터는 설거지 할 짬도, 심지어 그릇을 제자리에 놓아둘 여유도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왜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남루한 일상이 반복될수록 괜히 답답한 마음에 싱크대 구석구석 낀 물 때를 박박 씻어내본다.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반질거리는 깨끗함에 무거웠던 공기도 한층 가뿐해질 찰나, 부엌은 저녁을 준비하는 온기로 분주해진다. 기름냄새, 무쇠팬에서 재료들을 지지직 볶아내는 소리,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밥을 짓는 이 모든 것들은 헛헛한 나의 마음을 꽉 안아준다.


화장에 허투루 시간을 빼앗기지 않겠다며 각분각초를 다투는 평일 아침에도 나는 시간에 시간을 쪼개어 부엌 한 켠에 서서 숨을 고른다. 출근 준비하기에도 분주한 타이밍에 부엌타령이라니. 이를 과학적이고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어찌되었건 간에 그 날의 요깃거리를 준비한다던지, 매일 손봐야하는 누카즈케(채소를 절이는 일본식 겨된장)를 뒤집어가며 한 번씩 점검해보는 일은 언제부턴가 복작복작한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힐링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바쁘다 한들 부엌의 진한 이끌림이 나는 그래서 좋다. 첫 아이를 낳고 20개월이란 시간이 나를 관통하는 동안 부엌은 나의 가장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는 쉼터이자 온전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매일 손질하는 누카즈케 (채소를 절이는 일본식 겨된장)

 

출근 한 시간 늦었던 날 아침 만든 에그샐러드: 푹 삶은 감자에 삶은 계란, 다진 양파, 다진 오이, 마요네즈


바삭바삭하게 구운 식빵과 함께라야 그 맛이 빛나는 에그샐러드




그 언젠가 집 안 가구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무엇인지 묻던 누군가의 질문이 떠오른다.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부엌 살림만큼 애착이 가는 부분은 없었다. 부엌이란 공간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식탁을 일순위로 떠올렸다. 옆에서 다소 어리둥절해하던 남편과 다르게 뿌듯함 비슷한 기분 좋은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던 기억.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허기지면 자동으로 냉장고 문 앞으로 직행하고 울적하면 테이블 위로 단정하게 놓인 케이크 한 조각에 위로받는 부엌의 익숙한 편안함이 늘 좋았다. 하물며 갖가지 채소를 손질하여 넣어둔 타파웨어들이 냉장고 안에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이니 이만하면 부엌예찬론자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 같이 밋밋한 날, 저녁 반찬으로 시금치와 우엉볶음을 만들어 먹으면 어떨까 생각하며 퇴근을 기다린다. 육아에 지쳐 허덕이느라 기운이 쏙 빠져 모양새없는 저녁 차림이 될 것이 뻔하지만 활력이 필요할 땐 부엌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해본다. 일종의 기분전환 같은 것. 어쨌거나 시금치와 우엉은 빨리 사야겠다. 부엌 냄새가 벌써 그리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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