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자 선교사님!
긴 비행 끝에 우리는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새로운 땅에서 펼쳐질 일들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나누며 기도했던 긴 여정이었다.
도착 전까지 현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공항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한국 선교사님이셨다.
우리는 집을 구할 때까지 그분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천사 같은 독신 여자 선교사님의 친절하신 보살핌으로 첫 이집트의 시간은 여유 있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한국인의 정은 어디서나 따뜻했다.
선교사님은 작은 체구에 다리를 절고 계셨지만,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페인트가 벗겨진 벽과 시멘트가 드러난 작은 집, 짐들이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내 눈에는 아늑하고 역사 깊은 곳처럼 느껴졌다.
그분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이집트에서의 첫 시간은 평안했다.
그분은 특히 장애를 가진 여성들을 섬기며 헌신하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장애인 여성 이거나 신앙을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은 장애인 여성들을 위해 작은 집을 마련해 주고, 지속적으로 돌보셨다.
자신의 아픔과 다리를 회복하기 위해 수많은 수술을 겪으며 살아낸 삶을 이야기하며, 그런 삶을 살아서 더욱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다.
아픔을 겪은 경험들은
우리의 삶에 큰 힘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장애를 가진 여성들은 가족에게도 안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폭력과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 같은 집에 머물면서 이집트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누구도 쉽게 나설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었고, 작은 체구의 독신 여성 선교사님은 그 위험을 감수하며 돕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오빠에게서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갑자기 가족들이 본인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하여 너무도 가고 싶어 했지만, 선교사님은 쉽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한 번 더 확인하고 가자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그래도 오빠인데 왜 반대하실까?’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고향을 향해 떠났다.
절룩이는 다리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자신을 찾고 만나고 싶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환송했고, 선교사님은 방으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셨다.
한참이나 지나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를 통해 다급하게 울려 퍼지는 남자의 목소리로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급히 나가셨던 선교사님이 귀가하셨다.
상황인즉, 자매가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사촌 오빠와 가족들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았는데 돌연 상황이 돌변하여 너무 무서워 다급히 도망쳐 나와 길에서 낯선 이의 도움을 받아 전화를 걸었고, 결국 다시 차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이 세 가지 단어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쉽게 무너지는 현실을 여러 나라에서 보아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돕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황순자 선교사님처럼.
그분과 첫걸음을 함께하며 나는 이집트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을 들여다보았고, 귀한 배움을 얻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여성 선교사님들이 묵묵히 헌신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역들이었지만, 아픈 자들을 돌보고 길러내고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다시 그분을 기억한다.
몇 년 후, 선교사님은 그 작은 집에서 홀로 지내시다 심장 질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셨기에 선교사님을 일찍 천국으로 데려가신 걸까?
이제 선교사님은 천국에서 편히 쉬시겠지!
나는 아직도 가슴이 아프지만, 선교사님이 남긴 사랑과 헌신은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고 지금도 어두운 이집트 구석구석에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아낸 아픈 만큼 더 성숙했던 선교사님이셨다.
황순자 선교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