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숙 Apr 06. 2022

내 인생 최고 VIP의 VOC

워킹맘, 퇴사의 세계

지금은 역사 속에 사라진 은행을 다니며 비서업무를 했던 1년여라는 시간이 있었다. 20년 전이던 당시에도 '글로벌'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연수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지원한 연수가 당첨이 되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올 무렵 외국어를 잘하는 비서를 선호한 신임 행장님 덕분?으로 영어를 잘하는 입행 동기와 일본어를 잘할 것으로 기대되는 내가 나란히 행장님 비서가 되었다. 은행에서 비서업무를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거니와 비서가 무슨 업무를 하는지 감도 없어 CEO를 보좌하는 자리는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임 행장님의 취임을 축하하는 수많은 화환과 꽃다발을 보며 과연 이 일을 잘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은행에 입행한 순간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나보다 먼저 비서업무를 하고 있던 동기는 어리버리한 나와는 달리 참 똑 부러지고 재발랐다. 동기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잔소리를 들어가며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바로 상대방이 원하는 걸 먼저 알아차리는'눈치'였다.


회사생활을 하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눈치'라는 것은 업무능력 이상의 영역이다. 능력이 떨어져도 눈치가 빠르면 능력치 이상의 혜택을 입기도 하고, 눈치 없이 구는 사람은 능력과 상관없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빠질 수도 다. 은행 합병으로  비서생활은 일 년 만에 종지부를 찍긴 했, 사전에 '눈치껏' 준비하고 피드백하는 기술을 얻게 되었. 덕분에 VIP실에서 일할 때에도 '눈치'고객을 세심하게 응대하고 배려하는 나의 궁극기(게임용어/궁극의 기술)가 되었다.


순간의 머뭇거림, 곁눈질, 흔들리는 시선, 끝맺지 않은 말, 말과 말 사이의 공백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 같은  생긴 듯하다. 그 생활을 20년 가까이하은행 문을 넘어 들어오는 모양새만 봐도 어떤 업무를 지, 직원에게 무엇을 물어볼지 예상된다. 물론 나만 특별한 건 아니다.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일 테다. 그래도 한 조직의 CEO를 모시며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조금 더 세심한 관찰을 하게 되었다는 나만의 확신 같은 건 생겼다.


그런데 오랜 시간 개인기를 펼치며 VIP 고객을 정성껏 모셨는데, 정작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VIP 고객은 챙기지 않고 있었다. 그건 바로 내 가족, 특히 늘 바쁜 엄마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던 내 아이들. 가장 중요한 내 1번 고객과 2번 고객은 엄마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있었다. 은행에선 단어 하나 놓칠세라 고객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집에 있는 내 최고 VIP 고객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는 바쁜 엄마.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눈치채려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러기는커녕 아이들의 요구사항을 대놓고 무시하는 나.






"띠링~VOC가 접수되었습니다!"


순간 컴퓨터 오른쪽 아래에 팝업창이 떴다 사라진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접수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있기에 이렇게 목소리 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담당자인 나로서는 지점장님을 넘어 지역본부장님까지도 라인을 타는 사인이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앞서 VOC를 받은 담당 직원은 잔뜩 움츠러진 채 죄송하다고 한다. 고객응대를 했던 직원에게 앞뒤 상황을 파악하고, 고객의 VOC를 몇 번이고 읽어보며 어떤 상황이었을까 정리해 본다. 이런저런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만다.


"어떻게 된 일이지?"


라는 윗 분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요점 정리하고 팔로우업을 시작한다. 누구의 잘못이 되었건 해당 지역 최고 대장님까지 보고해야 하니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회신이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무슨 공모전에 응모라도 하듯 글쓰기 실력을 발휘해 본다. 단어 하나하나 고르고 또 고른다. 그저 형식에 벗어나지 않는 반성문을 쓰는 것은 아닌지, 고객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글인지, 진심으로 해결하고자 하는지, 해결 방법은 제시하고 있는지.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다면 개선할 수 있는지 그 순간만큼은 그 고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 엄마, 9시까지 온다고 했는데 왜 안 왔어요? 기다리다 잠들었잖아요. ”

“ 엄마, 숙제 도와준다고 했는데 왜 잤어요?"

” 이번 주에는 꼭 놀러 가기로 했는데 왜 잠만 자요?"

“ 오늘 다른 엄마들은 학교 온다고 했는데 엄마는 왜 안 왔어요?

” 친구들이랑 놀 때 엄마도 같이 있으면 좋은데 왜 못 와요?

“ 엄마 은행 꼭 다녀야 돼요?     


정작 아이들의 수많은 민원은 이미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아 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바쁘고 지친 내 입장부터 먼저 생각하기 일쑤면서. 대개 아이들이

" 엄마~"

하고 부르요청 사항이나 불만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잠시 누워 쉬고 싶을  때는 더더욱 심장이 쪼그라들 따름이다. 가끔 접수되는 은행 VOC는 그 난리를 치며 해결하면서도 내 아이들의 민원에는 귀를 막아버린. 


고객에게는 내 말 한마디에 혹여 상처받을 일이 생길까 단어 하나하나 고심하여 선정하면서 정작 내 아이들은 얼마나 상처받을지 생각도 못하며 툭툭 내뱉거나 못 들은 척 하기 예사다. 혹은 나의 안 좋은 감정과 스트레스가 오히려 아이에게 전달되도록 심한 말을 골라서 하기도 했다. 오늘 처리하지 못하면 내일로 넘기면 그만이다. 혹은 영영 처리하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엄마는 너무 피곤하니까.


" 엄마 너무 피곤해."

" 엄마 지금 너무 바빠."

" 지금은 시간이 없어."

" 잠시만~"

" 내일 해 줄게."

" 진짜야. 내일은 꼭 해줄게."


"고객님 저희도 어쩔 수가 없다고요."


라고 속으로 외쳐보듯 아이들에게 나도 힘들다고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거겠지. 그런데 그 상대가 고작 아이들이라니.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다. 민원에는 단어 한마디 고객의 심경을 거슬릴까 신중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면서, 정작 나의 최고 VIP 고객인 아이들에게는 막말을 해대고 있는 모양새란.






“오늘은 엄마가 아파서 집에 있었어요.

그래서 좋았어요.

엄마 사랑해요, 고마워요.”     


엄마가 아프더라도 오늘만큼은 함께 집에 있어 주었기에 좋았다는 둘째 아이의 일기. 둘째 아이가 8살에 그린 그림일기에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엄마!"

하며 부르고 있다. 엄마인 나는 침대에 누워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말풍선에는

“왜!”

라고 써져 있다. 내 얼굴은 귀찮아 죽겠다인데 그런 대답에마저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다. 게다가

“사랑해요, 고마워요.”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돌이켜보니 아이가 "엄마~"하고 부르면 내 대답은 늘 "왜!"이다. 다정한 "왜애~?"가 아니라 짧고 간결한 "왜!"      

 엄마 바쁘고 힘드니까 빨리 말해! ”

“ 또 왜? 꼭 나를 불러야 하니?”     

라는 마음이 숨어있겠지. 건조한 '왜'라는 대답에 아이는 알게 모르게 얼마나 상처받았을까. 그럼에도 나를 향해 그림일기를 들고 환하게 웃어주는 아이의 모습이라니.


사랑스러우면서도 가슴 한 편이 찌릿한 그 순간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아파 누워있는데도 오늘 하루 엄마가 집에 있다는 사실이 몹시 기쁘고 행복한 아이의 이 소중한 하루가 가슴 아다. 아이의 이 일상을 기억하고 반성해야지.     


워킹맘은 등교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잘 다녀오라는 배웅도 못해주고, 하교해서 집에 들어서는 순간 잘 다녀왔냐는 맞이조차 해주지 못한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이기에 미안한 마음은 가득하지만 정작 체력은 따라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핑계 저 핑계로 이 조그만 녀석들의 요청 하나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하다니.


물론 육아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잡으러 다니는 것과 같아 가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두들겨 패고 싶은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땐 혼자 은행 놀이를 시작해야겠다. 이 아이들은 내 최고 VIP! 가장 소중히 모셔야 할 사람. 20년간 쌓아 올린 내 눈치 실력 좀 발휘해볼까?


“ 네 고객님. 뭐가 필요하세요?”      

"네 고객님 어떻게 해 드릴까요?"

"네 고객님, 이리 와서 숙제 좀 하시죠."

"네 고객님, 왜 화나셨어요? 무엇을 좀 도와드릴까요?"


희한하게 스멀스멀 올라왔던 격한 감정도 사그라든다. 내 마음가짐조차 달라진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 아이는 공손한 엄마 태도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아직 천지 구분을 못하는 둘째 녀석은 꺄르르 웃는다. 그동안 VIP 대접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내 1번 고객님과 2번 고객님.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 최고의 VIP 고객으로 모셔야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