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숙 Apr 21. 2022

부모는 아이의 든든한 지원군

워킹맘, 퇴사의 세계

“엄마, 학교 가기 싫어요.”

“응? 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이와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큰 아이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남자아이들은 학교 생활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지도 않거니와 주먹다짐 같은 특별한 사건사고만 없으면 무탈하게 생활하는 거라 믿었다. 바람대로 아이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다지 말한 적도 없고, 모범생은 아닐지언정 큰 문제없이 학교를 잘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5학년도 거의 끝나갈 무렵인 10월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몇 마디 묻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여태껏 이렇게까지 버틴 적은 없었는데 싶다. 별 일 아니겠지라고 믿고 싶지만 심상치 않은 것 같다. 그래도 학교란,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야만 하는 곳이다. 요맘때 아이들이 보통 한 두 번은 학교 가기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으레 하기에 이 상황도 감기 같은 거라 생각하고 싶다. 달래고 달래어 등 떠미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쌓이고 쌓여서 울음을 멈추지 않는 걸까?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달래고 달래어 어렵사리 이야기를 들었다.    


“ 엄마, 제가 자꾸 숙제를 안 해가서, 훌쩍, 쉬는 시간에 일어날 수가 없어요.”

“ 응? 숙제했다고 했잖아. 계속 안 해간 거야? "

" 네, 학습지를 매일 풀어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

" 그래도 숙제를 안 한 건 잘못한 건 맞아. 선생님이 화내실 만도 하지. 그런데 쉬는 시간에 일어날 수 없다는 건 무슨 말이야?"

“ 매일 학습지를 풀어가야 하는데 그걸 안 해가면 쉬는 시간에 일어나면 안 돼요. 훌쩍, 훌쩍.”     


선생님은 매일 수학 학습지 서 너 장을 풀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셨고, 숙제를 안 해가면 쉬는 시간에 자리를 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선생님도 한창 뛰어놀 아이를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훈육시키지는 않았겠지. 아이가 하도 안 해가니 선생님도 화가 나셨나 보다 싶었다. 설상가상 벌 받는 중 다른 친구가 와서 벌 받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 그 친구마저 자리에 앉아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 친구들이 점점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님께도 찍히고 친구들에게도 찍혀버린 거다.


숙제를 안 한 것은 분명 아이의 잘못이고 숙제를 잘했는지 챙기지 못한 나 역시 잘못이 크다. 하지만 한창 에너지 넘치는 12살 남자아이가 화장실 가는 시간 말고는 대부분 책상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다니 그런 체벌이 있을 수 있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 벌을 받으면서도 계속 숙제를 안 해가는 아들도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의 기본 권리를 빼앗는 선생님의 훈육방식도 놀라웠다. 숙제를 안 하는 아이는 선생님이 공개 왕따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한창 친구들과 놀고 싶고 학교가 사회생활의 전부인 아이에게 이런 훈육방식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 아이가 너무 숙제를 안 해와서요. ”

며칠 뒤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 숙제를 안 해서 몇 번 혼냈는데 이제는 저한테 반항하기 시작하더라고요."

" 아휴, 선생님 너무 죄송합니다. 저도 좀 더 잘 챙겨보도록 할게요. 이렇게 매일매일 하는 건지 몰랐습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앞으로는 좀 더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아이가 많이 부족하지만 가끔 격려해 주신다면 좀 더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 듭니다."    

" 네, 그럼요. 어머니께서도 같이 챙겨봐 주세요."

 

그래, 선생님께서 앞뒤 없이 아이를 훈육했을 리 없다. 큰 아이에게는 선생님께서도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고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 설득했다. 알아듣게 이야기했다 싶었고 선생님께도 잘 챙겨보겠다 말씀해 주셔서 잘 넘어가리라 생각했는데 며칠 안 가 또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했다.


" 엄마, 선생님한테 저를 잘 부탁한다고 얘기했어요? "

" 응? 아, 그게 뭘 특별히 잘 부탁한다는 게 아니라 조금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칭찬해 주시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거야. 왜?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셨어? "

" 저도 화내지 않으려고는 했는데 그래도 자꾸 화가 나서.. 흑흑. 근데 선생님이 네가 그러고도 너희 엄마가 잘 봐달라 부탁한다고.. 엉엉. 친구들도 다 보는데, 수업시간에. 그게 뭐예요. 왜 그런 부탁했냐고요.."

" 응? 선생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 친구들 앞에서? "

" 엉엉...."

"..."


회사에서 자기 일은 똑 부러지게 했을지 모르나 생전 학교에 찾아가 보지도 못했고 그럴 시간도 없었던 이 어리석고 무지한 엄마는 상황 판단이 안되었다. 학교라는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 곳인지 알지 못한다. 내 직장생활 챙기기도 바빠 아이는 학교에만 보내면 학교가 알아서 잘해줄 거라 착각했다. 갑자기 닥친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엄마인 내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육아에 있어서는 젬병이었다. 아니면 내가 이 모든 상황을 너무 상식적으로만 이해했던가? 전업으로 또래 아이를 돌보는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다.

  

“ 그래서 내 말은.. 학교에 가서 이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고, 아이랑 내가 잘못한 부분은 사과를 드리고, 아이 말이 사실인지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 만약 그렇다면 아이에게 사과해달라고 부탁드려야 할 것 같은데.."


" 어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선생님한테 그렇게 얘기한다고? 이제 곧 5학년도 끝나잖아. 그냥 참아. 동생도 같은 학교 다니는데 그래 봐야 선생님들 사이에서 괜히 소문나고. 찍히기나 하고. 동생한테 좋을 리도 없지."


어쨌든 선생님 말씀을 지지리 듣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는 심지어 대들기나 하는 몹쓸 5학년짜리 아이의 엄마가 와서는 자기 아이 상태는 되돌아보지도 않고 선생님한테 따지더라, 이런 스토리밖에 안 되는 거였다. 엄마는 직장을 다니는데 자기 일 한다고 바빠서 애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관심도 없다. 결국 이런 뻔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세상 모든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얼굴로 자고 있는 아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행여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부모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랄까. 왜 이런 힘든 이야기를 진작 하지 못했을까? 이야기해도 결국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을까?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든든한 마음이 들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눈에는 한없이 착하고 귀여운 아이지만 선생님 앞에서는, 친구들에게는 잔뜩 나쁜 행동과 말만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절대라는 건 없으니 말이다. 수십 번 이야기해도 숙제를 해오지 않는 아이. 잡담하느라 수업 분위기 흐리는 아이. 반항하는 아이.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 선생님 눈에는 도저히 구제불능이라 여겨진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온갖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명확해지는 한 가지 사실은 결국 부모인 내가 이 아이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


아이가 잘못했다면 사과드리고 아이의 올바른 학습 습관과 태도를 위해 노력하면 될 것이고, 선생님의 부당한 처우가 있었다면 아이에게 사과해 달라 하면 될 일이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 아이도 늘 나쁜 행동만 한건 아닐 테니 칭찬할 일이 있다면 칭찬하고, 잘못한 일을 했다면 합리적 수준의 체벌을 받고 개선되도록 노력하자. 5학년이 한 달이 남았든 하루가 남았든 그 시간만큼은 아이에게도 편안한 학교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래. 내가 힘써주어야 한다.


뒷 일은 너무 고민하지 말자. 지금 딱 머릿속에 든 생각을 실천하면 될 일. 선생님께서도 하실 말이 많으실 테니 들어드리자. 내 이야기도 하면 된다. 무엇보다 어렵사리 꺼낸 아이의 이야기를 그저 별 일 아닌 걸로 만들지는 말자. 아이가 처한 SOS 신호를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적어도 " 힘들다고 얘기했잖아요, 하지만 해결되는 건 없는 거네요."라는 좌절감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 선생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선생님과 오해가 있다면 풀고 아이를 믿고 든든하게 지원해 주는 부모가 되어야지.       




" 처음 뵙겠습니다."

" 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선생님께서는 아이들 의자를 가리킨다. 마치 학생이 되어 선생님을 우러러보듯 작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 작은 의자에 구겨 앉으니 참 작아진다. 학부모는 왜 늘 이 낮은 의자에 앉아야 하는 걸까? 전용 상담실은 없는 걸까? 순간 이 낮고 불편한 의자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왜 선생님께 혼나는 느낌이 드는 거지? 이렇게 이야기하다 아이들이 등하교하며 상담내용을 듣는다면, 그 사실을 아이가 알게 된다면 아이는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직장 생활에서도 상사와 부하 직원이 동등한 높이의 의자에 앉아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는 법인데 왜 지금 나는 학생 의자에 앉아 벌써부터 기가 죽어야 하나? 며칠 밤낮을 고민하고 찾아온 건데 의자에서부터 조금 공평하지 않은 전선이 형성되어 버렸다.


다행히 작은 의자에 구겨앉아도 긴장되지도 않고 흥분되지도 않았다. 그저 내 아이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최우선으로 믿어주는 부모가 되자 며칠 내내 다짐하고 또 다짐해둔 덕분인가 보다. 혹 생각했던 말을 못 하게 될까 미리 메모해 두었던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을 펼치고 연필을 꺼내 들었다. 몇 차례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고 당돌하기 짝이 없는 이 엄마는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 선생님 아이를 맡기고 제대로 부모 역할도 하지 못해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만 바쁘게 하느라 저도 아이를 너무 챙기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아이의 말과 행동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간 숙제도 못해가서 많이 속상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잘 알지 못했던 아이의 학교생활을 파악하고 많이 반성 중입니다. 아이도 잘못했다고 속상해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이와 이야기하던 중 몇 가지 사실이 인지되었는데 확인을 좀 해도 될까요?"


선생님은 흠칫 당황해하셨다.


" 선생님, 저희 아이가 숙제를 못해가면 쉬는 시간에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리고 저희 아이와 이야기하는 아이 역시 앉아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

저희 애는 숙제를 많이 안 해가서 5학년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와 놀지 못하고 앉아 있었나요?"


" 선생님, 저도 너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후회되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5학년 내내 그리 지낸 게 속상해서 혹여 조금이라도 잘한 일이 있다면 칭찬을 해주십사 부탁드렸어요. 격려를 면 조금이라도 바뀔까 해서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친구들 앞에서 엄마가 잘 봐달라 했다 말씀하셨나 봐요. 제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아이가 너무 수치스러워했어요.  "


나의 도발로 아이가 더 주목받고 소문이 나고 행여 동생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칠 수도 있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어찌 조심스럽지 않을 수 있었으랴. 자식의 일이니 부모가 당연히 참아야 하고 내 아이를 단속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래도 아이가 처한 상황을 믿어주고 목소리를 내어 준 부모가 되자 싶었다. 남은 두어 달이라는 학기 동안만이라도 아이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찾고 공개 왕따는 당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친구와 한 마디라도 더 얘기할 수 있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뛰어 놀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여쭤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가운데서 아이도 의무와 규칙을 좀 더 잘 지켜낼 수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상담을 끝내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선생님께서는 감정적인 체벌에 대한 개선을 약속하셨지만, 여태껏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엄마인 나는 뭘 했단 말인가. 나 역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어째서 이렇게 학습태도가 좋지 않고 찍힐 만큼 인지도 못했단 말인가. 아이는 어째서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하지도 못했나. 바쁜 엄마에게 얘기해봐야 관심 없다고 애당초 포기한 걸까? 숙제 따위 안 해도 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까? 엄마한테 얘기할 시간도 없었을까? 바쁜 엄마 붙잡고 이런 복잡한 얘기 해봐야 건성으로 들을 거라 생각했을까? 해결될 리 없다 생각했을까?


그전까지는 아이는 스스로 잘 클 거라고 착각했다. 나는 바쁜 워킹맘이지만 엄마가 뭐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 역시 부모를 보며 스스로 잘 따라올 거라는 착각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친한 은행 언니들을 만났을 때 내가 아이를 신입행원 대하듯 지시한다며 그러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기대치에 맞추려고 아이를 그저 채찍질했던 모양이다. 이런 일이 터지고서야 아이 심리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상담도 다니기 시작했다. 미술치료를 한다는 곳도 방문했다. 한없이 아이 눈치를 보았고 엄마라고 부르면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들어주었다. 육아서적에 나온 바람직한 반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모든 초점을 맞췄다.


대화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하는 것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예전에는 엄마로서 하고 싶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면 이제는 아이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최대한 간결하고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내가 요구하는 기대치만큼 따라오지 못해도 닦달하지 않았다. 아이 역시 엄마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때 본인이 억울하다 여긴 부분을 부모가 어루만져주었다 생각했는지 더 많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던 그 사건 이후 나는 아이에게 더욱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얘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된 거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림 출처. 독수리 오 형제)

이전 01화 내 인생 최고 VIP의 VOC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