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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Feb 26. 2019

‘셈 치고’

살아가기




[이 아침에] '셈 치고' 살아가기                                                                     

                     수필가/이정아


2월 중순이 되면 교회 청년회가 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10불짜리 티켓을 사면 하트가 만발한 벽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경품 추첨을 한다. 밸런타인스 데이 기념 부부 사진 찍기 행사인 셈이다. 그런 사진의 액자가 책상 위에 졸졸 이 6개 늘어서 있다.

올해 찍은 사진은 그간의 병고로 인해 더 폭삭 삭아서 씁쓸했다. 그 마음을 위로하듯 경품이 당첨이 되어 빨간색 커피메이커를 선물로 받았다. 낙담하여 버릴까 했던 사진을 복이 들어오는 사진인가 싶어 보관하기로 했다.

친구 H는 딸네 집에 밸런타인스 데이 행사가 있어 간다고 한다. 사위가 딸과 함께 외식을 한다며 아이들을 봐달라고 했단다. 주인공이 아니라 도우미로 간다며 "이 선생은 남편이 밸런타인 선물해 줄 테지요?" 한다. 얼마 전 혼자된 쓸쓸함이 전화 너머로 전해져 온다. 그녀의 남편은 이벤트의 왕으로 불릴 만큼 때때마다 아내에게 잘했다. 남들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 집은 늘 그렇듯이 교회에서의 행사 말고 다른 이벤트는 없었다. 기대하지도 않았고 없다고 섭섭하지도 않았다. 내가 알아서 읽고 싶은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는 남편에게 알렸다. 장미 한 다발 정도의 돈을 썼으니 밸런타인 선물 한 셈 치라고.

어려서 읽은 세계명작 동화집 중 '소공녀'가 있다. 주인공은 원래 부잣집 아이였다가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자 신분이 바뀐다. 그래도 낙담하지 않고 "…한 셈 치고" 하며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인상 깊게 읽은 그 책의 주인공 세라의 태도가 퍽이나 마음에 들어서, 이날 이때까지 그 흉내를 내며 산다. 잘 안 풀릴 땐 해결책으로 "…한 셈 치고"를 내 삶에 적용하곤 한다. '셈 치고'의 마인드로 살면 낙담할 일도, 쓸데없이 다투어 기운 뺄 일도 없다.

밸런타인스 데이에 찍은 부부 사진을 연차적으로 들여다보니 세월이 갈수록 확연히 늙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남편과 나는 서로 좋아하는 사진이 다르다. '좋은 사진'이란 본인이 잘 나온 사진을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듯 터무니없이 예쁜 사진은 명작이라며 좋아한다. 그러니 집에 걸어둘 만큼 자신만만한 사진은 '내가 아닌 나'처럼 찍힌 사진인 것이다. 좋은 사진엔 늘 가짜인 내가 있는 셈이다.

신문에 글과 함께 나는 내 사진은 20년 전에 찍은 가족사진에서 오려낸 것이다. 예쁘진 않아도 젊기 때문에 계속 쓰고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깜짝 놀란다. 그 사람이 이 사람이냐고. 거짓말은 아니지 않은가? 사기성이 농후하다 뿐이지 나인 것을.

밸런타인 핑계로 주문한 4권의 책 중 하나인 조해너 배스포드의 '비밀의 화원(Secret Garden)'을 펼친다. 어른용 컬러링 북이다. 색연필을 가지고 꼼꼼히 칠하다 보니 재미있다. 색칠에 몰입하는 순간엔 세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공녀인 셈 치고.

아,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주 중앙일보/기사입력 2015/02/23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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