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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아 Sep 10. 2021

인생만사 새옹지마

기타 등등의 삶

이정아 / 수필가  | [LA중앙일보] 2021/09/10 미주판 22면

| 입력 2021/09/09 19:00



페이스북에 20대의 사진을 올리는 게 요즘 유행이라기에 쓸만한 사진을 찾아보았다. 우리 나이 때의 사람들은 추억에 잠겨 옛날을 반추하는 걸 좋아하는지, 여기저기 한창때의 사진으로 젊었던 한 시절을 과시하기 바쁘다.


작정한 이민이 아니라 유학생 남편 따라와 눌러앉은 이민이라 젊을 적 사진이 수중에 없다. 한국의 친정집 다락 어딘가에 있을 듯하다. 대학 졸업 앨범 사진을 올렸더니 “총기 있네” “똑똑해 보이네” 칭찬이 무성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똑똑하지 않았다.


치열한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들어가서 받은 첫 성적표엔 형편없는 석차가 적혀있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내겐 큰 충격이었다. 엄마도 마찬 가지였는지 망연자실. 모녀는 부뚜막에 앉아 기막혀 울었다.


심기일전하여 머리 싸매고 공부해 보았으나 다음 학기도 성적이 크게 오르지 못했다. 강남 강북이 있기도 전이니, 연희동 변두리 아이와 도심 아이들의 차이였는지 아니면 전국에서 몰려든 비슷한 아이들끼리의 경쟁이어서였는지 성적 올리기는 참 어려웠다.


나의 모교'경기’는 내겐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교복을 입고 길에 나서면'경기 학생’이라고 모두들 칭찬하였지만 내 마음속엔 남모를 열등감이 있었다. 중고교 6년 동안 성적은 그저 그 타령으로 뒤에서 세면 더 빨랐다.


고3이 되자 입시를 대비하여 반을 나누었다. 절반은 서울대반, 20% 정도는 연고대반. 나머지는 기타 등등반으로 나뉘었다. 집 가까운 여대를 갈 생각이었던 나는 ‘기타 등등반’에서 대입 준비를 하였다. 내가 시험을 치던 해부터 논문식 시험으로 바뀐 그 여대는 선생님들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대책이 없다며 신문기사와 사설을 읽게 하는 것이 입시 준비의 전부였다. 혼란 속에서 기타 등등반은 여유작작하게 놀아도 양해가 되었다.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기타 등등’의 역사는 이처럼 오래된 것이다. 주위의 친구들이 의사나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 또는 전문직을 택할 즈음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다. 비교적 평등한 이곳에서 살면서 열등감은 많이 희석될 수 있었다. 동창들처럼 초일류가 아니었기에 남편을 공부시키기 위한 험한 일도 큰 갈등 없이 감당할 수가 있었다.


꽃집 알바도, 세탁소의 옷 수선도, 인형 만들기도 기꺼이 해냈다. ‘기타 등등의 삶’으로 이미 단련된 마음의 근육이 아니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타 등등’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삶의 지경을 넓혀준 그늘의 체험이 살다 보니 참 소중한 거였다.


그랬던 내가 졸업하고 34년이 지난 모교의 10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영매(英梅)상’을 받았다. 경기 졸업생 중 학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이 되었다며, 교화인 매화가 새겨진 주먹 덩이 만한 금도금 모표에 표창장을 받았다. 내가 좋아서 한, 글쓰기와 책 출간을 모교에서 축하해 준다니 감사한 한편 민망했다. 평생 간판이 되어 나를 도와준 모교를 내가 표창해야 될 입장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란 걸 증명받은 순간이었다. 보잘것없는 나 같은 이를 명예로운 졸업생에 끼워준 걸 보면 경기여고가 대단한 학교임엔 틀림이 없다.


후배인 이숙영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양희은 선배의 미니 리사이틀에 한참 선배이신 이순자 여사와 각 분야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모신 동문의 밤이었다. 내 마음속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모교가 비로소 따스함으로 마음속에 와닿았던 날이었다. 우리끼리의 말로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매상이 좋긴 좋은가보다. 오랫동안 맺혔던 맘이 풀렸다.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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