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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정수 May 07. 2016

브라질 노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1월 15일은 브라질에서는 휴일입니다.

바로 1889년 11월 15일 이날 왕정체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날입니다.

1822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후 왕정체제로 나라를 유지하였지만 이날 Deodoro Fonseca 장군과 세력들에 의해 공화국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당연히 왕정체제에서는 자유, 교육, 세금 등 모든 면에서 대다수가 피해를 보고 소수만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유럽을 자주 접하는 젊은 지식인들 층에서는 이미 유럽은 공화국으로 바뀐 것을 보고 브라질도 시대에 맞서 바뀌여야 한다고 주장하죠.

독립시기부터 공화정을 주장하던 공화파들은 지속적인 항의 끝에 드디어 Dom Pedro 2세를 폐위시키고 공화국으로 바뀌며 새 시대를 열어 갑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잘 알려진 바인데 사실 이 뒤에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바로 1년 전 선포된 노예해방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죠..

사실 공화정은 젊은 지식인들만 지지했던 것인데...

1년 전 Dom Pedro 2세가 유럽을 돌며 신문물을 배우고 있을 동안 딸인 이사벨 공주가 바로 선포한 것이죠..

당시 브라질은 아직 노예제도를 유지하며 무지막지 부려 먹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가까워서 그런지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흑인 노예(500만 명 추정)를 들여온 나라이기도합니다.

이미 1871년 9월 28일 Ventre Libre라는 법을 통해 노예의 자식들은 노예가 아니라고 선포하였지만 그래도 노예생활은 지독히 고통스러웠습니다.

DomPedro 2세는 당시 국왕이기도 하지만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으로서 철도를 들여오고 교육개발에 투자를 하는 등 시대를 앞서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노예해방에는 찬성을 하나 일방적으로 해방시키면 지지기반이던 농장주들에게 큰 피해가 가고 결국에는 나라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따라서 급진적 해방운동가인 딸에게 신신당부 하기를 절대로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랬것만 아버지가 여행을 하는 동안 쿵쿵 짝짝 세력을 모아 일방적으로 해방을 선포하죠..

당연히 농장 지주들이 죽일 듯이 일어나는데 정부에서는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노예 1명당 얼마를 주기로 해 놓고 정작 돈이 없던 정부는 차일피일 미루는데...

노예 서류를 태워 버리기도 해 손해를 본 농장 지주들이 정작 공화정으로 마음을 돌립니다.

공화정을 선포한 신정부는 왕족들을 모두 브라질에서 쫓아냅니다.

모든 재산도 압류하고 이곳 브라질에서의 모든 뿌리를 뽑아 버립니다.

하여간 이 날을 기념하여 내일은 휴일입니다. 

16일은 금요일 샌드위치 날이니 당연히 쉬어야겠죠?

아 그리고 20일 화요일은 흑인 정신의 날이라고 휴일인데 전국이 아니라 상파울루 주만 쉽니다.

내일부터 다음 주 화요일까지 그냥 쭈~욱 놀 사람들 많겠습니다..

자여기까지가 역사의 전반전이면 이제 후반전으로 들어가 봅니다.

드디어 이제 브라질 독립에 대해서 다뤄 보겠습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1820년....

유럽을 전쟁터로 바꾸었던 나폴레옹도 드디어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포르투갈에도 섭정, 잠시나마 공화국 선포 그리고 다시 왕정 등 정치가 어수선합니다.

정작동 주엉 6세 왕은 브라질에서 잘 있는 동안 포르투갈은 정세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습니다.

동주엉을 비롯한 왕족들은 나폴레옹을 피해 브라질로 왔지만 문제가 발생한 게.....

바로 브라질이 너무 좋다는 것...!

날씨가 조금 더운 것 빼고는 추운 겨울도 없고.... 

물자도 풍부하고....!

노예도 풍부하고....!

모든 게 좋다 보니 돌아갈 생각들을 아예 접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포르투갈 사정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브라질로 수도를 옮기면서 모든 재정 또한 가져왔기에 경제는 파탄되었고..

나폴레옹이 물러간 후에 식민지와 거래를 다시 시작했지만 예전 갔지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 일부 군인들이 목소리를 냅니다..

"우리를 버리고 간 왕을 모셔야 하다니... 차라라 공화국을!"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들은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와 연계하여..

당시 강국이며 내정에 간섭을 많이 하는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평등주의를 주장합니다.

물론 영국과 일부 귀족들의 반격으로 이들은 체포 및 해산당하지만..

절실히 왕의 귀환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고..

동주 엉 6세는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뿌리인 포르투갈을 잃을까 봐 허겁지겁 돌아옵니다.. 

그 대신 브라질에 장자인 동 뻬드로 1세를 책임자로 세우고 배 타고 돌아갑니다..

준비되지 않은 체 왕이 된 아버지와 달리 동 뻬드로 1세는 어렸을 때부터 수업을 천천히 받아 왕의 기질이 확실한 인물입니다.

다혈질에 공부도 많이 했지만 특히 정치적으로 눈치가 빠르기로 유명합니다.

뻬드로 왕자 또한 원래는 아버지와 함께 포르투갈로 가기로 했으나 그래도 이 넓은 땅을 지켜야 하기에 남습니다.

영웅이어서 그럴까... 뻬드로 왕자는 여자들을 그리 좋아합니다.

그리고 술과 파티로 진탕 놀고 시간을 보내는데 주변에 브라질 태생 귀족과 젊은 군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모입니다.

이들 은어 차피 왕도 없는데 우리 브라질 따로 놀자는 즉 독립 움직임이 시작한 것입니다.

물자 나인구나 풍족한 브라질이 포르투갈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 독립세력에는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의 영향이 큽니다.

또한 독립이 처음부터 공화파 그리고 왕당파 등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물론 뻬드로 1세는 아버지와 떨어져 나라를 운영할 의지와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변의 강압에 아무리 왕이라도 차츰차츰 힘이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포르투갈에서도 1820년 왕이 돌아간 후 몇 차례 왕명을 보냈습니다.

먼저 전 세계 식민지는 더 이상 리우 데 자네이루가 아닌 리스본에 복종할 것...

리우 데 자네이루 사법부 임무정지, 그리고 왕자의 귀환 등입니다.

그러 나 이런 힘 세력에 맞서 브라질 식민지들은 끊임없이 왕에게 청원합니다.

좀 소통하자고.....

그러나 역시 말 안 통하는 국왕보다는 그래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왕자에게 모든 시선이 모입니다.

드디어 1822년 왕의 귀환 명령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리우데자네이루 왕국에 모입니다..

그리고 뻬드로 1세는 중대 결정을 내립니다... 의회에 통보하여 

짐은 이곳(리우 데 자네이루)에 있겠노라~~~ 

이 게그 유명한 Diado Fico(번역: 머무르는 날)입니다..

하여간 일단 포르투갈로 귀환을 포기한 뻬드로 1세는 한숨 돌렸다고 생각하기도 전..

이제는 독립 하 자는 요구에 지쳐 갑니다....

아침 들어~~~

그러던 중 1822년 8월 말 상파울루에서 독립운동 조짐이 벌여지자 400킬로미터 떨어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친히 군대를 몰고 올라옵니다.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며 복종을 요구하며 반대세력을 잠재웁니다... 그리고...

뻬드로 1세의 애인은 이곳 상파울루에서 60 킬로미터 떨어진 산토스라는 해변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곳까지 온 김에 애인도 볼 겸 해서 바닷가를 갔다 다시 상파울루로 돌아옵니다..

상파울루는 해발 750미터로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당나귀를 타고 천천히 올라옵니다..

그러나 굴을 잘 못 먹었는지 배탈이 났습니다..

가다 가 서고.... 조금 더 가다가 서고...

특히 강가 만 나오면 왕명으로 모든 짐을 풀고... 천막을 치고...

강가에서 특왕 X을 지리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을 추스르면 다시 짐 싸서 출발~~

뭐 이런 간단하지 않은 단계를 거치다...

드디어 상파울로 시내로 들어가는 언덕 강가에서 마지막 천막을 칩니다.

그지역이 지금의 이삐랑가(ipiranga)지역입니다..

아래 사진이 지금은 그냥 도량 같지만 당시만 해도 물이 제법 흐러던 강가였었습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왼쪽 깃발대 근처에서 천막을 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잦은 X사와 고열로 힘들고 있을 때 포르투갈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급하게 전해집니다..

동주 엉 6세로부터 온 편지인데 그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덜...

후딱 정리하고 빨리 돌아와로..

안 오면 이~놈하고 군대 보내 혼내 준다!"

햐~~몸도 아프고 정신없고 짜증 나고 있을 때 다른 편지도 도착합니다.

독립운동의 가장 중심인물인 주세 보니파시오(JoseBonifacio)가 보낸 편지로 이제 포르투갈과 관계를 끊으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가 의 공주이자 아내인 마리아 레오뽈지나(MariaLeopoldina de Austria)로부터 온 편지는 더욱 가관입니다.

의회장과 모든 의원들로부터 독립 지지를 받았다는 내용 그리고 "익은 과일을 따지 않으면 썩습니다."라며 힘을 주는 편지입니다..

햐~~정말 정신없죠? 

자 이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좀 생각을 한 후... 그래 결정했어!

서기를 불러 서류를 가져오게 합니다..

바로그 독립선언서...

그리고 짧게 서명합니다....

휘리릭~~~ 됐지?

서류를 받은 서기는 천막 앞에서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읽습니다.

"짐은 어쩌고....

모든 책임을... 저쩌고...

해서.... 독립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선언했다고 하는데....

정작 뻬드로는 침대에 누워서 비몽사몽이었고..

위와 같은 멋진 문구는 후대에 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독립선언을 그림으로 남기었는데 그 그림은 바로 아래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백마를 탄 기사단들의 경례를 받으며 나에게 독립 아니면 죽을 달라~~라고 칼을 들고 소리치는 뻬드로 1세의 모습!

너무 멋진 이 그림은 1888년 브라질 화가 뻬드로 아메리꼬(Pedro Americo)의 1888년 작품입니다.

즉독립이 이뤄지고 66년이 흐른 후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 나이 그림을 보면 몇 가지 오점이 있습니다.

먼저 당시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말이 아닌 당나귀나 노새를 탔었습니다 그러니 저런 말을 타고 여행은 안 했고...

멋진 기사단은커녕 국립 군대조차 없었던 시절에 호위기 사는 당연히 없었고 귀족이나 농장주인들의 인부들 뿐이었다고 합니다.

뭐 어느 나라 역사나 자기 역사를 미화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에는 화가의 얼굴이 있기도 한데...

바로 오른쪽 집 창문 아래에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이 그림은 발표될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바로 1875년 발표된 프랑스 화가 장 루이스의 작품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대충 분위기 파악이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 이제 끝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고 금방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지방 곳곳에 왕정에 충성을 선언한 사람들과 몇 차례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달리 해양대 국도 아니고 인구도 적은 포르투갈로써는 식민지를 쳐들어 올 힘도 의지도 없었죠..

몇 차례 전투로 잔재세력을 물리치고 충성 선약을 받은 동 뻬드로 1세 국왕은 이제 정치적으로 힘을 돌립니다.

바로 당시 대국이었던 영국과 협상을 하는 것..

영국이 독립국으로 인정을 해주면 뭐 이미 끝난 게임이었죠..

결론은 독립 당시 주체세력이었던 계몽주의(프리메이슨) 자들이 원했던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들 이원 했던 노예해방은 물 건너갔고..

농업혁명 또한 정착되지 못하고 일부가 대다수를 가진 농장 대지주 제도..

1차 산업이 이끄는 수출제도..

그리고 공화정이 아닌 왕정제...

자 이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독립은 큰 적자입니다.

먼저 1820년 동주 엉 6세가 포르투갈로 돌아가면 나라에 있던 현금이라는 현금을 모두 싹 쓸어 갔습니다.

따라서나라는 빈털터리였습니다... 1808년에 설립된 브라질 은행은 파산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을 지지해주던 영국의 중재로 브라질은 영국에 당시 돈으로 2백만 리브라를 채무 지게 되었습니다.

이 돈은 당시 포르투갈이 영국에 지고 있던 채무로써 브라질이 수도였을 당시에 차용했던 돈인데..

이제 독립했으니 대신 갚으라는 것이죠 이게 브라질 대외채무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첫걸음마가 이렇게 빚으로 시작했으니 에휴....

즉독립의 기초였던 평등. 기회. 자유. 경쟁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가볍게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지고 있던 빚을 떠안고 시작한 나라..

그래서 아직까지 밑에 있는 사람들은 허덕이고 발전이 더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아 그리고 동 뻬드로 1세는 정작 독립을 선언한 후...

남부 독립운동으로 현재의 우루과이를 빼앗기고..

포르투갈은 아버지 동 주엉 6세가 사망한 후 여동생에게 왕위가 넘어갔었으나

막내 남동생이 정권을 휘둘러 어지럽고...

하여간 양국 간 문제를 해결하려다..

결국 1831년에 아들동 뻬드로 2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포르투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남동생과 전쟁을 치르는데..

처음에는 내전이 점차적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퍼지며...

전제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1834년 힘겹게 전제주의를 회복시켰으나...

안타깝게도 전쟁이 끝난 몇 달 후 폐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36살 젊은 나이에...

그래도 지금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만든 인물로 존경을 받고 포르투갈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는 합니다.

자 재미있으셨나요?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지만 브라질 역사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아 맞다 아래 사진은 현재 상파울루 있는 독립을 선언한 곳에 세워진 이삐랑가 독립기념 박물관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여행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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