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대륙 유대인 최초 정착지는 바로 브라질!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니 인간들이 너무 어지러워 한 번싹 정리하신다고 하여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하 하였다. 착한 노아는 큰 배를 만들어 온 갖 들짐승.집짐승을 넣고 40일간 폭우를 피하고 살아나는데 여기서 문제, 목숨을 구한 것은 좋은데 그 많은 동물이 쏴대는 배설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엄청나게 쌓여서산을 이루다가 드디어 냄새를 참지 못한 노아가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문을 열어 바다로 던져라~"이렇게 산을 이룬 그 많은 똥은 두둥실 바다로 흘러갔고 배 안에 남아 있던 사람과 동물은 모두 시원해 했다고 한다.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무지 흘러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고 살았는데 한 포르투갈 탐험가가 "도대체 그 많은 똥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전혀 도움 안 되는 호기심에 그 똥산을 찾아 나섰고. 인도 항로 개척 접어 버리고 수년간에 걸쳐 고생한 끝에 드디어~~~!!!!그 똥산을 발견했는데....그날이 바로 1500년 4월 21일이라고 한다. 참고로 1500년 4월 21일은 포르투갈 탐험가 Pedro Alvares Cabral 이 브라질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날이다. 다 웃자고 한 소리이지만 브라질은 1500년4월 21일에 발견 되었다. 물론 여기서 살던인디오들에게는 발견이라는 말은 우습게 들리겠지만 요즘 발견도 Pedro Alvares Cabral 이 아니라 다른 탐험가가 먼저 했었다고 하는 등 요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처음발견된 브라질 땅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저 금이나 캐어 가려고 했는데 금은커녕 아무런 보석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일부인디오들을 만났지만 역시 이들은 금보다는 그저 백인들의 흰 피부와 옷차림에 관심이 많았다. 술이라는 것도처음 접한 인디오들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 했지만 역시 포르투갈인들에게는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거의 버려지다시피하던 중 Pau Brasil 이라는 나무가 발견된다. 이 나무는 arabutã,ibirapiranga, ibirapitanga, ibirapitá, orabutã, pau-de-pernambuco,pau-de-tinta, pau-pernambucoe 등 여러 복잡한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끓이면 빨간 염료를 만들 수있는데 16세기만 해도 이 색은 왕이나 종교인들만 사용할 수 있는 색이어서 엄청 비쌌다.1530년까지 이 나무를 잘라 포르투갈에서 염료 장사로 돈 좀 버는데 이때 이 나무 이름으로 인해 브라질 국명이 탄생하였다.브라질 나무가 나는 땅, 브라질.
그러나역시 역사는 다시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들을 통해서 재조명되는데 Brasil 이라는 이름은 원래 아일랜드 근처에 있다고추정되는 상상의 섬 이름이라고도 한다. 완전 환상의 섬, 무엇이든지있는 섬이라고 하는데 브라질이 하도 멀고 신기한 동.식물들이 많아서 당시 많은 사람이 그 섬이 아닌가 해서부르며 유래됐다고 한다. 또 다른 설명은 당시 가장 큰 염료 시장이었던 베네치아에서는 예멘에서 수입하는wars 라는 나무를 사용해서 염색하는데 이게 변형되어 verzino, verzi, verçí,으로 발전되다 brésil그리고 최종에는 "Brasil"로 바뀐 것이라는 주장도있다. 물론 포르투갈어 Brasa 와 Abrasado 와 같이 짙은 나무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됐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어찌 되었건 브라질은처음에는 나무만 발견되나 차츰 성을 쌓고 사탕수수 재배에 성공하며 점차 마을에서 도시행태를 띄운다. 당시만해도 성은 바다와 땅을 보전한다는 의미보다는 인디오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워지는데 이는 모든 물자와 거래는 바다로 하고 땅은 인디오들의 습격으로좀 위험하다는 생각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578년 당시 포르투갈 왕이었던 24살 동 세바스찌엉 1세(D.Sebastião I de Portugal)가 모로코 원정에 나섰다가 전투에서 대부분 군인들이 몰살당하고 행방불명 된다.왕이 없어지면서 갑자기 왕위계승 문제가 생기는데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스페인의 펠리피 1세가 포르투갈 왕권을 이어받는다. 물론 이에 반대파도 많았고 여러 분리 운동도 있었지만,실질적으로 1580년부터 완전독립을 취하는 1640년까지 포르투갈은 전 식민지와 힘을 잃어버리고 아주 거대한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포르투갈을집어삼킨 스페인은 또 다른 조치를 취하는데 당시 식민지였던 네덜란드와 브라질과의 거래를 못 하게 금지시킨다. 네덜란드로써는 사탕수수 재배에 돈을 많이 들였는데 큰 피해를 당한셈이고 이를 좀 더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초부터 불기 시작한 종교개혁에서 캘빈주의를 받아들였고 종교의 자유를 주어전 유럽에서 유대인과 상인들이 몰리며 갑자기 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유대인들로부터 자금을 많이 축적한 네덜란드는신규 시장 개척과 개발이라는 목적 아래 인도와의 거래를 위해 또 해양사업에 뛰어든다. 포르투갈로부터 시작한해양개척은 스페인을 거쳐 이제 네델란드까지 뛰어 들게 된 것인데 이들은 동남에서 재배되는 사탕수수를 남미에서도 재배에 성공하며 설탕을 직접 재배.가공.판매하게 된다.
원래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투자와 시장이라는 두 개의 합의점으로 거래 하던 나라였습니다. 포르투갈로써는 별로 큰 도움이 안 되는 브라질땅에 네덜란드 인들이 사탕수수 재배를 하도록 둔 것이다. 물론 세금을 받으며 거래를 한 것이다.네덜란드로써는 자금과 기술력으로 거대 농장을 만들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며 사업을 잘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갑자기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자 시장은 물론 투자해 놓았던 것도 다 잃게 된다. 스페인의 섭정을 받다 1568년부터 1648년까지 시작된80년 동안 독립전쟁을 할 정도로 악화한 두 나라의 관계로 브라질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던 네덜란드는 몇 차례에 걸쳐브라질 침략을 시도한다. 주요 해안 도시에서 성만 쌓고 살던 브라질 침략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문헌을 보면 네덜란드 인들이 배를 타고 와서 도시를 점령하면 도시 사람들은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 스페인 함대를 이끌고 지원대가 오면 네덜란드 인들은 쫓겨나기도 했다. 1630년 카리브에서스페인 본국으로 보내지던 은덩이를 카리브 해에 있던 네덜란드가 탈취한다. 이를 자금으로 삼아 총64척의 배에 3,800명의 인원을 꾸려 브라질 북동부에 위치한 올린다(Oinda)와 바로 인접한 헤시피(Recife)시를 점령한다. 그리고 곧바로 본국에서 6,000명의추가 군인들을 받아 충원하여 이번에는 완벽히 브라질을 점령하려고 한다. 이들을 피해 산으로 피한 시민들은이들이 곧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차츰 돌아온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계 브라질인들과 금방 친해진다.원래부터 거래를 목적으로 점령한 것이어서 오히려 브라질 사탕수수 농장 주인들에게 자금을 대준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대량 들여와 이들을 싼값에 농장에 공급하며 생산량을 늘리도록 한다. 그러나 설탕 생산의 가장 핵심기술인 정제는 반드시 네덜란드인이 하는데 하여간 설탕 수출로 돈을 많이 번다.
신세계거주지를 드디어 마련한 네덜란드인들은 인구를 늘이기 위해 현지인들과 결혼을 많이 한다. 군인들로 구성된 인원이어서 그런지 인디오와흑인 그리고 포르투갈계 현지인들과 결혼을 하며 아이들이 많이 자란다. 그리고 브라질을 점령하는 동안 살았던8만 명의 네덜란드인으로부터 현재 1백만명의 후손이 사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본국에서 오는 이들 중에는 유럽에 살며 갖은 핍박을 받고 특히 불기 시작한 종교재판을 피해서 네덜란드로 피신했던 일말의포르투갈계 유대인들도 있다. 돈은 많지만, 어디를 가나 차별을 받던유대인들도 브라질로 온다. 1636년 암스테르담에서 온 Isaac Aboab da Fonsec 랍비에 의해 남미에 첫 시나고가 즉 유대인 희랍당을 설립하며 자리를 잡아 간다. 600 세대에 이를 정도로많은 이들이 몰려 사며 브라질, 네덜란드 인들과 화목하게 살아간다. 돈도 많았던 이들은 모든 경제에 깊게 개입하여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고 투자에 선금을 내는 등 깊은 관여를 한다.종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자유를 추구하던 네덜란드 점령지는 만연히 발전할 것만 같았는데 내부적으로는 전투가 끊이 없이이뤄지기도 했다. 포르루갈 직계였던 사람들은 항상 불만을 품고 때로는 인디오들을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위협을 나타냈다. 그러다 드디어 1640년 포르투갈의 4번째 왕족혈통인 브라간사(Braganca) 공작이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동 주엉 4세로 임관하며 스페인으부터 독립을 선언한다.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사이 경쟁에서 밀려났고끝이 없는 해적들의 피해로 파산직전이었던 포르투갈 상인들의 불만, 그리고 오랜 전쟁으로 군인이 모자랐던 스페인은포르투갈 귀족들을 전투에 보냈으나 정작 목숨만 잃게 하고 얻는 게 없었던 귀족들의 불만이 모여 1640년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 중 패하여 힘이 많이 약해져 있던 스페인은 반대하며1668년까지 근 28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국운이 이미 꺾여 평화협정(리스본 협정)을 맺게 된다.독립운동 시기에 포르투갈은 프랑스, 신흥세력 영국, 네덜란드, 로마와 협약을 맺으며 위치를확고히 하고 안으로는 성을 쌓고 정치.경제 안정에 힘을 쏟아 재부흥에 성공한다.
나라를되찾은 포르투갈은 먼저 네덜란드와는1640년 10년간 평화조약을 맺는다. 전쟁보다는서로 힘을 합쳐 스페인을 공격하자는 것이다. 이때 이 협정으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 힘을 쏟아드디어 1648년에 독립에 성공한다.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다시 찾아와 힘을키우다 1654년 드디어 브라질 헤시피 시도 되찾는다. 전쟁에서 이긴포르투갈이지만 그래도 네덜란드에게는 좋은 장사였다. 먼저 40년에 걸쳐8백만 Florins를 받기로 했는데 당시 금액으로 보면 63톤의 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령에 있는 섬 Molucas와 스리랑크를 양도한다. 이렇게 돈을 지급한 이유는 네덜란드에게 피해금액을 안 주면 끊임없이해군을 끌고 와 침략하겠다는 협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도시를 되찾는데 많은 이바지를 한 브라질인들은 이때부터독립의 꿈을 꾸게 된다 역사는 다시 흘러 헤시피시가 포르투갈에게 넘어가자 400여 명의 유대인들은 공포에빠지게 된다. 네덜란드인들이 만약 본국 귀환을 거부하고 남는다면 재산도 그대로 보존하며 다른 외국인과 같은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3개월 안에 모든재산을 처분하고 떠나라고 명령한다. 3개월 안에 재산을 처분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종교재판에 넘겨질까 걱정을많이 했고 시간은 흘러 4월 7일 당시 도시 최고 책임자인 Francisco Barreto de Menezes 은 출국기간을넘긴 유대인 중 원 유대인과 달리 기독교에서 유대인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종교재판에 넘길 것이라고 했다. 이에극도의 공포심을 가진 150명의 유대인은 그 다음 날 프랑스로 가는 배에 타 바로 떠난다.
이렇게 400여 명의유대인은 남미를 떠나 네덜란드로 간 사람도 있으나 가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신세계로 돌아와 자메이카, 바바도스, 꾸라싸오 같은 카리브에 자리를 잡아 브라질에서 가져간 사탕수수 농장을 꾸려가는 사람도있다. 그리고 일부는 담배 재배에 성공합니다. 브라질을 떠난 유대인들의삶은 정말 고달팠다. 그중 23명이 탄 배가 중간에 스페인 해적들에게납치되어 종교재판소로 보내질 뻔했지만 프랑스 배가 나타나 이들을 살려 주기도 했다. 이들은 다시 배를 타고떠나 새로운 땅에 도착해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도시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곳에 도착한다.뉴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이들은 도시 형성에 많은 참여를 하며 이곳에서도 첫 시나고가를 만든다. 그리고 이 도시는 10년 뒤 영국인들에게 넘어가 뉴욕이라고 새로 명명됩니다. 그렇다, 브라질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떠나 도착해서 정착한 도시 뉴욕! 1667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며 유대인들이 많이 몰리게 된다. 처음에는 시나고가근처에 몰려 사며 살던 이들은 미국이 독립을 취한 후부터 안정을 취하며 나라 발전에 참여하며 영향력을 미치게 되며 지금은 세계최대 유대인 사회와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자 여기서 생각한다.만약 브라질이 유대인을 쫓아내지 않고 그대로 포용했다면? 세상 강국은 지금의 미국이아니라 브라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영어가 아닌 포르투갈어로 대화 하고 있을지상상도 해 본다. 500년전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세파르딤 유대인의 후손은 이제 포르투갈 스페인 국적을 회복할수 있다.그것은 끊이없이 주장된 역사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며 요즘 경제가 안 좋아 포르투갈 국적은크게 인기가 없지만 그래도 같은 유로존이어서 다른 나라로 이동 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문제는 당시 브라질로오면서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실바, 올리베이라, 뻬레이라 등 포르투갈성씨로 개명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이 예전에 유대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란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그래도 오랜만에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