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rA Dec 15. 2023

RED #1 온도

RED로 (   )을 말하다. 그리고 그리다.

촛불 하나가 꺼졌다.

무거운 침묵이 덮치고 짙은 어둠이 내렸다. 암전 가운데 난 조용히 멈춰 섰다. 어디선가 와글와글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금세 흩어졌고, 어디선가 쉴 새 없이 뜨거운 물이 흘러나와 어느 한 편에 깊이 고일듯하다 금세 말라버렸다. 그러는 사이 서늘한 냉기가 이곳저곳에 스며든다.

난 꽤 담담하게 서 있다. 시간과 공간을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광활한 밤하늘이 쏟아내는 농밀한 어둠이 처음에는 불편하다가도 결국 그 정적 안에 수용되기를 바라듯이 난 그렇게 한동안 공허한 어둠 가운데 서 있다.     


촛불 하나가 켜졌다.

어둠이 슬며시 물러난다.  따듯한 온기를 가득 품은 빛이 어둠의 퇴로를 친절하게 열어주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둠을 정죄하는 듯한 날카로운 빛이 한꺼번에 들이쳤다면 난 새까만 바퀴벌레처럼 어디론가 숨기에 바빴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감정을 최대한 꼭꼭 숨기기 위해 무척 애를 쓰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둠을 밀어낸 이 붉은 빛은 묵직한 밀물처럼 천천히 다가왔다. 그 지혜로운 속도와 무게를 인정한 나는 그 자리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고백합니다.

어느 때부터 당신을 마주하기 어려웠습니다.  시간의 중력에 눌려 무력해지는 당신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강인하고 부드러운 기품을 잃지 않으려 끝까지 발버둥 쳤던 당신이 보잘것없는 몽당 초가 되어 당신 곁에 무거운 눈물을 쌓아 올리는 것을 보기가 버거웠습니다.


당신의 불이 꺼지는 그 순간까지 당신은 곧게 서서 온기를 전하려 애썼을 테지요. 분명 그랬을 겁니다. 당신은 아니었지만, 저는 언젠가부터 당신과 비겁한 숨바꼭질 놀이를 해왔죠. 꼭꼭 숨어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깨달아요. 당신은 애초부터 보물찾기 놀이를 준비해 왔었다는 걸요.


고단한 삶 가운데 당신이 마련한 소중한 빨간 선물 상자를 발견할 때마다 당신의 뜨거웠던 열정과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을 깊숙이 느낄 테지요. 저의 모자람과 어리석음 때문에 빨간 상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뿐이에요.

 

저의 차가운 동행에도 뜨겁게 작별해 줘서 감사해요. 잘 가요! 우리 다시 만나요.

-----

사진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RED로 ( )을 말하다. 그리고 그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