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요정의 백수인생』
백수가 되고 서러운 점도 참 많다.
작년 여름 재택근무를 할 때는 하루 종일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은 쾌적한 환경에서 지냈다. 추워서 가디건을 걸치면서도 에어컨은 끄지 않는 Flex. 한 번 켜놓은 전등도 귀찮다는 이유로, 어차피 다시 켤 거라는 이유로 잘 끄지 않았다. 근데 백수가 되고 나서는 전기세가 무서워서 한여름에도 혼자 있을 땐 에어컨을 끄고 선풍기 하나로 버티다가 실내 온도가 30도쯤 돼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때쯤 에어컨을 켠다. 이전엔 끄기 귀찮아서 온 집안의 불을 계속 켜놨다면, 이젠 끄기 귀찮으니 처음부터 켜지 않는다.
직장에 다닐 때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가장 좋은 걸 샀다. 가격표는 보지 않았다. 일 년 넘게 해외에 나와 살면서도 이곳의 쌀 값이 얼마인지, 고기는 얼마인지도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근데 백수가 되어 통장 잔고를 신경 쓰게 된 뒤부터는 기본 식재료의 가격은 물론이고, 내가 한 달에 최소 얼마가 필요한지, 어디에서 줄일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만 했다. 한 번의 외식 또는 배달에 드는 돈은 일주일 식비와 맞먹는 가격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외식 횟수도 줄었다. 세일하는 물건을 찾고,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세일하기를 기다리고, 마트에 가면 가격표부터 살펴본다.
처음엔 이런 생활에 한숨도 나오고, 구질구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지출에 신경을 쓰다 보니 나의 소비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일주일에 대략 얼마를 소비하는지도 알게 됐고, 어떤 물건을 어느 주기마다 사는지, 그러면 다달이 나가는 예상 지출이 얼마가 되는지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무리 해보려고 마음먹어도 잘 안되던 것들이 저절로 몸에 익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도 과소비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 충동구매를 할 때는 있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사라졌다. 필요한 물건이 생겨도 정말 필요한지 몇 번이고 고민했고, 그러다 보니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니멀리스트까진 아니어도,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렇게 서러움을 불러온 환경의 변화는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제관념이라곤 전혀 없던 한 인간이 절약정신을 깨우치고 계획된 소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러운 백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덕에 예상치 못한 성장을 하고 있는 이직요정.
그래도 먹고 싶은 걸 고민 끝에 먹어야 하는 건 여전히 서럽다 ㅜ__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