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새로 시작한 일은 신선했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도 약간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럴듯한 비전과 말들에 고개 끄덕이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회사에 들어와 보니 야근이라는 이름의 “야영”이 빈번한 곳이었다. 오전엔 회사에서 자거나 비몽사몽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오후 근무시간에는 회의라는 명목으로 수다 떨며 시간 보내다가 퇴근 즈음 되어서야 일을 시작한다. 그마저도 대충 하다가 저녁 먹으러 나가서 술도 한잔하며 두어 시간 보내고 회사로 다시 돌아와 침대 펴고 자는 일상의 반복. 나는 똑같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입이 뭘 어쩌겠나. 처음엔 회사 분위기에 최대한 맞추려고 했다. 굳이 하루 만에 다 끝내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남아서 모두 하고 갔다. 집에 가면 10시가 넘는 날도 있었다.
하루 종일 일이 없어 한가했던 어느 날, 6시가 되어 퇴근 준비를 하다가 내 귀를 의심했다.
“저녁 먹고 와서 시작합시다.”

네? 뭘? 도대체 뭘 저녁 먹고 시작하자는 거지??
나는 눈치를 보며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아 무언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말을 꺼낸 상사는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하나를 끝내면 또 하나의 일이 생겨났다. 이런 비효율적인 업무가 새벽 1시까지 지속됐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집에 보낼 생각을 안 했다.
"야식으로 치킨 시켜 먹고 합시다."
저 말을 듣는 순간부터 더 이상 표정관리가 안 됐다. 정색을 하고 상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치킨은 됐으니 남아있는 할 일 주시면 끝내고 빨리 가겠습니다."
상사는 내가 갑자기 정색을 해서 당황했는지 민망한 얼굴로 얼굴이 빨개져서는 말까지 더듬었다.
"어.. 어... 이제 할 일 없으니까 집에 가세요."
이날 이후로 아무리 눈치를 줘도 더 이상 야근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근무시간에 최대한 집중해서 일을 끝내고 칼같이 집에 갔다. 아닌 건 아닌 거다. 참을 만큼 참았고 내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이곳에 문제는 더 있었다. 내가 신입으로 들어오니 나이, 학력, 경력, 실력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게 없는 사람이 먼저 있었다는 이유로 대리가 되었다. 한참 뒤에 알았지만 대표의 가족이었다. 역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나와 나의 입사 동기를 제외한 모두가 혈연 또는 지연으로 엮인 사이라는 것. 그리고 이후에도 사람을 뽑았는데, 역시 지연과 학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회사의 분위기는 점점 대학교 동아리처럼 변해갔다.
여기서 끝이었다면 조금 더 버텨볼만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문제는 직장 내 성희롱과 성추행이었다. 어떻게 참았냐고? 당연히 나라면 안 참았다. 그걸 알았는지 내 앞에선 점잔들을 떨면서 꼭 내가 자리에 없을 때 막내 여직원들한테 추근거렸다. 그녀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나의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져만 갔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어쩌겠나. 발 벗고 나서서 뜯어고칠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었던 곳도 아니었고 말이다. 최근 그곳의 근황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또 누군가의 동생이 입사를 했다고 한다. 역시나였다. 회사 자체도 인맥으로 유지되고 있는 곳이라 그리 쉽게 망하지는 않고 있다. 역시 우리나라 사회는 학연/혈연/지연이다. 이 중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부딪히는 일개 직원의 신세한탄은 여기서 끝☆
자꾸 나를 피하는 대표를 찾아가 퇴사 의사를 밝히고, 복합적 의미가 담긴 사과를 받고, 친했던 직원들에게만 개인적으로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꼬마 대리님이 다음날 오전 회의에서 왜 내가 아직도 출근하지 않았냐고 물어서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였다는 뒷이야기. 여러 가지 의미로 재미있는 곳이었다.
이직요정의 다음 행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