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돼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배부른 돼지가 될 테냐 아님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테냐’고 질문을 하면 백이면 백 배부른 돼지가 될 거라는 대답이 나온다고 한다. 나도... 때로는 어쩌면 더 많은 날을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나 스스로가 나를 막연히 속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윤도현과 전인권이 제발을 듀엣으로 부르는 영상을 보고 다시 한번 역시나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멋지구나... (전인권이 배고프진 않겠지만) 난 늘 이러고 싶어 살고 있었구나 하고 다시금 본연의 내 꿈을 돌아보았다.
100세 시대다. 우리가 예측하고 가늠하던 100세와는 또 다른 100세 시대가 올 것이다. 더 오래 일하고 더 젊지만 더 늙은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미래에 대처하다 어영부영 우리의 젊은 노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노년은,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젊고 활기찰 것이다. 다만 그것을 맞이한 우리의 느린 예측만이 늙어서 허우적거리다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내 젊음이 생각보다 꽤나 길었구나.
30대면 내 미래에 대한 청사진과 획일성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우리 아버지의 삶을 보았듯이. 내 친한 친구들의 아버지들을 보았듯이. 내가 20대에 만들어 놓은 미래가 쭉 그렇게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삶에 있어서 Major가 수도 없이 바뀌어 결국 80이 다 되어 자기 삶의 가장 큰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낸 사람의 인생은... 뭐랄까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너무도 더딘 내 미래처럼 느껴졌다.
다시 돌아와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해보자면, 잘하는 것과 웰메이드인 것과 예술의 거친 진정성의 간극을 어린 시절 보아버린 내 시야는 어쩌면 불행한 삶을 찾아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그저 대중적으로 깔끔하게 내 생긴 대로 살 것이지. 무엇이 그렇게 고팠는지 무언가 불행한 진흙 구덩이에서 겨우 눈 뜨고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예술이 왜 그렇게 고팠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 사회뿐만이 아니다. 그저 예술가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난할 뿐이다. 물론 피카소처럼 부우우자인채 예술가의 삶을 산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인류의 행운아 일뿐이다. (그저 아주 유년기보부터 모두가 공감할만한 축복할만한 재능을 타고났으니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거칠고 대단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미켈란젤로도 가난하고 늘 후원자에게 시달린 인생을 살았으니 말이다.
결국 모두 투정일 뿐이다. 삶은 그저 흘러가고 누구나 불안정할 것이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난 그저 작은 선택과 행복의 길을 찾아 이 길에 서 있고, 내일도 내 행복과 미래를 위해 걸어갈 뿐이다. 배고픈 돼지가 되지말자. 적어도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위대한 소크라테스도 아니 되면서 배고프다 투정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