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시대
물건의 과잉 시대이다. 불과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시절만 해도 옷이 없어서 옷을 사고, 등산화가 필요해서 등산화를 샀으며 가방이 없어서 가방을 샀다. 지금 우리의 세상은 필요에 의해서 보다 취향과 취미의 영역에서의 소비 시대가 왔다. 다시 말해 생존을 위해서보다는 좋아서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 하얀 운동회도 수켤레다. 흰 티셔츠도 몇 장 인지도 가늠도 되지 않는다. 비단 기본적인 생필품에서 뿐만이 아니다. 잉여 시간과 그에 따른 취미의 영역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이 따른다. 다시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우리네 부모님들은 일을 하다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잉여시간을 찾기 힘들었고 심지어 주 1회 휴일에 그마저도 오롯이 쉴 수 있는 직장이 드물 정도였다. 지금의 잉여 시간과 물질적 풍요로움에서 파생되는 과잉 소비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내었다고 말하고 싶다.
카타르시스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처음 나온다. ‘카타르시스’란 독자 내면에 방치된 채로 썩어가던 상처를 픽션의 비극을 통해 직면하고 비로소 하지 못했던 슬퍼함을 통하여 치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소비 방식이 대다수 내면의 스트레스와 비극을 표출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작은 해소법이 과잉으로 인한 그로기 상태까지 오게 되었다. 이러한 그로기 상태는 단순한 착각일 뿐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비극의 스트레스는 결국 또 다른 해법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비우기 운동이 성행하여 단조로운 삶을 추구하게 되는 듯했지만, 그러한 패턴은 결국 또 다른 소비를 합리화하여 이동하였으며, 알게 모르게 우리는 시간을 소비하고 여유를 낭비하는 소비 패턴으로 전이하게 된다.
인간의 뇌는 부정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생각하지 말라 ‘라는 명령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다른 생각들과 행동들로 덮어둘 뿐이다. 언젠간 결국 욕구는 폭발할 것이고, 그것이 두렵 다면 나를 설득할만한 완벽한 삶의 루틴을 새로 설계해야 할 것이다.
과잉의 시대 다시 말해 풍요의 시대일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아주 작은 내 마음과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진실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본능적이고 가장 인류학적인 유익한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눈은 너무나 타인으로 향해 있다. 그로 인한 과잉과 과욕이 너무도 많은 욕구와 지나침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적어도 내가 무엇이 행복한지와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았을 때 쓸데없는 이 인류의 과잉 시대를 벗어나고 진정한 비움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인류는 늙어 가고 있다. 인간이 늙어 가는 것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우리의 이 사회는 늙고 지쳐가고 있다. 그저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삶으로부터 어쩌며 너무나 빠르게 노쇠화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우리에게 조금은 본능적인 삶의 방향성이 필요(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