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나를 짓누를 때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나는 늘 조급함을 강요받는다. 그것들은 인지될수록 점점 더 강한 힘을 응집해 가고, 그 힘은 마치 느끼지 못한 채 산재해 있던 중력처럼 어느 순간 나를 덮친다.
42.195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린 뒤에야 비로소, 지구가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를 체감하듯, 그 힘은 어느 날 여유로움과 함께 찾아와 나를 짓누른다.
이것이 삶의 비츠(Witz)다. 위트의 어원이기도한 비츠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위트’와는 다르게, 이러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지점을 통해 삶이라는 거대한 서사에 경각심을 불어넣는다. 혹은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삶은 그 비츠를 통해 강렬한 자극으로 내게 조용히 귓속말한다. 비츠는 극의 구조 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작동하며 재미와 의미를 발생시키지만, 현실에서는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츠로 인해 삶의 긍정적 방향보다 우울감과 공허함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비츠란 쉽게 말해 아이러니가 의미로 전환되는 발화점 정도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느끼는 사건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드러나는 어떤 인물의 반전미가 태동하는 상황 말이다.
삶에서의 여유는 종종 반전으로 작동한다. 달콤한 휴식처럼 다가와, 자신이 눈치 챌 수도 없을 만큼 은밀하게 나를 잠식한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실감과 공허함이라는 살을 찌운 뒤에야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삶은 일정한 루틴 속에 놓일 때 한결 안정적이다. 더 길게 보았을 때, 내가 이루고자 하는 많은 것들 역시 이 루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때 현실에 가까워진다. 다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루틴에 집착하는 순간, 또 다른 집착에 잠식되어 삶은 다시 다른 비츠를 만들어 내고, 그 비츠는 우울이라는 심연으로 방향을 틀어 우리를 끌어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말대로 삶은 결국 고(苦)의 연속이라 말해도 과하지 않다. 그 고는 고통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의 연속이며, 그 현상을 걸러 내듯 통과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고통이 아니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작은 성공의 반복, 즉 루틴의 반복으로 스스로의 삶을 행복하게 느끼도록 현혹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단순화된 해석이다. 그는 결국 이러한 고의 삶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것을 분석하고자 했을까. 아마도 나를 알고, 바라보고,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가장 중요한 삶의 정서를 마주하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