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자유,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
개체의 소멸 그 자체가 인간에게 근원적인 공포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타자의 죽음에는 윤리적 공포를 느끼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소멸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무감각하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 죽음이 열어놓는 알 수 없음, 다시 말해 무(無)이다.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상태, 언어와 경험이 닿지 않는 공백이 인간의 공포를 형성한다.
어둠이 두려운 이유는 어둠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으며,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모든 담론은 살아 있는 자의 상상과 투사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이 무지를 견디지 못해 종교를 만들고, 형이상학을 세우고, 죽음을 설명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무를 해석하려는 시도이지, 결코 무를 경험한 결과는 아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고찰 없이 죽음을 ‘의지의 부정’ 혹은 ‘고통으로부터의 탈주’로 규정하는 태도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정교한 개념 위에 세워져 있으나, 정작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결여되어 있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알 수 없음을 두려워한다. 이 차이를 간과한 죽음론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자살은 단순한 생의 포기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왜곡된 오해로 드러난다. 자살은 죽음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이며, 윤리와 사회, 의미 체계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려는 착각이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유를 경험의 영역이 아닌 결과의 영역으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다.
살인 역시 이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 타인의 개체를 종식시키려는 욕망은 개체적 우위에서 비롯된 생존 본능의 왜곡된 발현이다. 살인을 통해 느껴지는 우월감과 안도감은 결국 ‘살아남았다’는 감각, 즉 생존의 감각이다. 타인의 가장 절대적인 존재 조건인 생명을 지배함으로써, 살인자는 자신의 결핍된 생존 본능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킨다.
그러나 모든 살인을 동일한 구조로 설명할 수는 없다. 충동적 살인은 지배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유 혹은 윤리적 경계가 침범당했다는 주관적 인식에서 비롯된 폭발이다. 이는 살인의 영역이라기보다, 죽음과 자살에 대한 고찰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 파열된 자유 감각, 그리고 무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취약성이 그 배후에 있다.
이 모든 고찰 끝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삶과 죽음을 둘러싼 문제를 언제나 지나치게 단순화해 왔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구원도 아니고, 의지의 부정도 아니며, 자유의 완성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경험의 바깥에 놓인 공백일 뿐이다. 인간의 비극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위대하면서도 동시에 한계가 분명해진다. 그의 사고 체계는 아름답고 치밀하지만, 삶의 스펙트럼은 지나치게 협소하다. 고통을 통과한 사유와 고통을 관찰한 사유는 다르다. 그는 세계를 설명했지만, 세계 속에서 충분히 소진되지 않았다. 그 차이가 3권과 4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류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것이다. 오류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사유는 깊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인간의 자유에 대한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는 선언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의심하고, 끝까지 통과함으로써만 잠정적으로 닿을 수 있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관조적 해석인가, 아니면 그 해석마저 의심하는 태도인가.
싯다르타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지금 다시 유효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가 죽음을 설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열반에 이르렀다’는 선언보다,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의 침묵과 방황, 실패와 체험으로 사유를 남겼다. 죽음을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았고, 고통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환원하지도 않았다. 고통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통과의 조건이었다.
이 지점에서 쇼펜하우어와 싯다르타의 차이는 분명해진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세계의 본질로 파악했지만, 그 고통을 살아내는 신체의 리듬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반면 싯다르타는 형이상학을 최소화한 채, 고통을 경험의 깊이로 끌어내렸다. 그래서 그의 사유는 설명이 아니라 태도로 남는다.
그리고 이 태도는 결국 니체로 이어진다. 니체의 초인은 죽음을 극복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전제한 채 삶을 긍정하는 존재다. 그는 무를 제거하지 않는다. 무를 견디는 힘을 기른다. 죽음을 해석하지 않고, 그 불확실성을 끌어안은 채 삶을 선택한다. 이것은 관조의 태도가 아니라 의지의 전환이다.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죽음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죽음을 포함한 삶을 살아내는 자세다. 무를 없애려는 시도는 언제나 종교와 도피로 귀결되지만, 무를 통과하려는 시도는 삶의 밀도를 변화시킨다.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밀어붙이게 만드는 조건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열반의 선언도, 죽음에 대한 체계적 설명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끝내 알 수 없음을 인정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다는 결단이다.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공포를 해석하지 않으며, 무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태도.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사유를 삶으로 끌어내린다.
죽음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전제로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자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