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고리와 메타포

예술과 외설의 경계

by 조범준

“은유에서 의도가 앞에 보이면 알레고리가 되고,

의도가 장면 뒤로 물러나 있으면 메타포가 된다.

은유는 알레고리의 농도가 옅어질수록 메타포에 가까워진다.”


알레고리는 언제나 친절한 언어였다. 이미 정해진 의미를 이미지로 번역하고, 장면을 통해 개념을 전달한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고, 오해의 여지도 적다. 이솝우화에서 동물들은 인간의 도덕을 대신 말했고, 종교화 속 인물들의 손짓과 시선은 교리를 가리켰다. 알레고리는 언제나 “이것은 이런 뜻이다”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은 자주 숨이 막힌다. 쇼펜하우어가 알레고리를 예술의 본질로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예술은 개념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데아를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어떤 장면이 의미를 먼저 들이밀 때, 관객은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이해는 빠르지만 체험은 사라진다. 감각은 해석으로 대체되고, 예술은 설명의 도구가 된다.


이 문제는 고전적인 알레고리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공연예술에서도 반복된다. 설명적인 가사, 친절한 대사, 서사를 요약하는 장면들. “우리에게 영웅이 나타났다”, “저들은 사문이다” 같은 문장은 관객이 이미 보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해준다. 그 순간 장면은 스스로의 힘을 잃고, 언어의 해설에 의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짜치다”, “너무 설명적이다”, “굳이…?”라는 말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이 먼저 내리는 판단이다.


이 감각은 음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단조 음악이 슬픔을 표현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슬픔이 아니라, 슬픔의 강요다. “지금 슬퍼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음계에 고정되는 순간, 감정은 선택지를 잃는다. 반면 같은 단조라도 탱고처럼 분노와 욕망, 비애와 관능이 뒤섞일 때, 감정은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장조 음악이 때로 슬프게 들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의미가 닫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알레고리와 메타포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둘 다 은유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알레고리는 의미에서 출발해 장면으로 내려오고, 메타포는 장면에서 출발해 의미를 열어둔다. 알레고리는 도착지를 보여주고, 메타포는 길 위에 머문다. 그래서 은유에서 의도가 앞에 보이면 알레고리가 되고, 의도가 장면 뒤로 물러나 있으면 메타포로 느껴진다. 은유는 이 둘 사이의 연속선 위에 있으며, 알레고리의 농도가 옅어질수록 메타포에 가까워진다.


이 논의는 외설과 예술의 경계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흔히 야동이 왜 예술이 아니냐는 질문은 노출의 수위나 도덕의 문제로 오해된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적 관점에서 그것은 훨씬 단순하고도 명확하다. 포르노그래피는 직관을 여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즉각 호출한다. 보는 순간 사유는 멈추고, 욕망은 자동 실행된다. 관객은 더 이상 직관하는 주체가 아니라, 원하는 주체가 된다.


그래서 외설은 예술이 되기 어렵다. 그것은 은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도가 너무 빨리 도착하기 때문이다. “흥분하라”는 명령은 설명보다 더 직접적이다. 이것은 알레고리보다도 더 낮은 상태다. 알레고리는 그래도 의미를 전달하지만, 외설은 의미조차 건너뛰고 의지를 바로 실행한다.


고대 조형물들이 의도적으로 이 위험을 회피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상화된 신체, 비현실적인 비례, 남성적 구조 위에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를 얹은 형식. 그것은 육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본능을 지연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즉각적인 성적 반응을 차단함으로써, 육체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형식과 리듬, 비례의 문제로 전환한다. 그 순간 신체는 외설이 아니라 메타포가 된다.


피카소가 엉덩이를 네 개의 선으로 그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선들은 엉덩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관능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곡률과 무게, 운동의 감각만 남긴다. 의도는 뒤로 숨고, 관객의 감각이 먼저 작동한다. 그래서 그 그림은 외설적이지 않고, 알레고리적이지도 않다. 메타포가 풍부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의미가 많아서가 아니라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본능적으로 기피해왔던 것은 알레고리 그 자체가 아니다. 내가 견디지 못했던 것은 의도가 장면보다 앞서 나오는 순간이다. 설명이 감각을 밀어내고, 의미가 체험을 대신하는 상태. 허도령이 그림자로 탈을 깎고, 그 이미지가 깨지며 포졸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말이 없어도 충분하다. 그 장면은 설명하지 않고도 서사를 품는다. 반대로 서사를 말해주는 순간, 장면은 스스로 말할 기회를 잃는다.


쇼펜하우어는 이미 오래전에 이것을 정리해두었다. 참된 예술은 가르치지 않고, 해설하지 않으며,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대신 의지를 잠시 침묵시키고, 관객을 직관의 자리로 데려간다. 우리가 어떤 장면 앞에서 “굳이…”라고 느낄 때, 그것은 실패한 관객의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 아직 장면으로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는 신호다.


알레고리와 메타포, 설명과 여백, 외설과 예술의 경계는 모두 같은 축 위에 있다. 그 축의 이름은 단순하다. 의도가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위치를, 생각보다 훨씬 먼저 몸으로 알아차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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