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삶에서 이유를 찾으려 하는가

헤르만헤세의 소설에 대한 고찰

by 조범준


인간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은 너무 오래 반복되어 이제는 상투어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해답이 아니라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장을 이해한 뒤에도 계속 살아야 하고, 살아가는 동안 이 문장은 매번 다른 무게로 되돌아온다. 아무리 많은 세월을 통과해도 세상은 그대로다. 인간은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변하지 않고, 고통의 원인 역시 이름만 바뀔 뿐 본질은 반복된다. 기대받던 아이는 다른 역할로 대체되고, 억압은 다른 제도로 이동한다. 사람들은 답을 찾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지만 세계는 그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간다. 살기로 결심해서가 아니라 살아지기 때문에, 연명은 선택이 아니라 기능처럼 수행된다. 고통스럽기 위한 연명인가 묻게 되지만, 사실 연명에는 목적이 없다. 숨은 쉬어지고 시간은 흐르며 몸은 다음 날로 이동한다.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이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 공평함은 위로가 아니라 냉정한 사실이다. 삶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성실함이나 순수함을 구분하지 않으며, 개체의 서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고통은 분배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누구의 인생이 더 감당할 수 있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이 공평함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방향을 필요로 하고 의미를 필요로 한다. 이 고통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남기는지, 왜 지금 여기에서 발생했는지를 묻지 않으면 고통은 순수한 소음이 되고 시간은 형벌이 된다. 의미는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구조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반복해서 구원의 서사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소설에는 구원이 없다. 적어도 텍스트 내부에는 없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그 안에서 구원을 발견한다. 그것은 헤세가 구원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읽히도록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성장소설로 읽힐 수도 있고, 사회적 상징 질서에서 이탈하려는 개체의 불가능성을 기록한 철학서로 읽힐 수도 있다. 싯다르타 역시 절망의 끝에서 세계와 화해한 이야기로 이해되지만, 실제로 그 결말은 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게 된 한 인간의 상태에 가깝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인간이 그 상태를 견딜 수 없어서 붙인 이름일지도 모른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자살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결말은 더 먹먹하다. 선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단하지 않았고, 다만 이미 소진된 상태로 삶에서 미끄러졌을 뿐이다. 이 죽음을 개인의 비극으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구조를 면책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비극이란 없다. 정상적으로 작동한 시스템의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비극이라는 말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만들어낸 위로다. 타인의 파멸을 보며 인간은 속으로 말한다. 적어도 나는 아직 저기까지는 아니라고. 인간은 다른 존재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안위를 합리화한다. 그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생존 방식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인간은 의지로 고통받고 표상으로 잠시 벗어난다. 이데아를 향한 사유, 예술, 철학, 문학은 고통을 제거하지 않는다. 다만 세계와 자신 사이에 아주 얇은 거리를 만들어준다. 그 거리만으로도 인간은 다시 하루를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의미는 진리가 아니다. 의미는 보상이다. 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최소한의 대가다. 삶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답은 여전히 없으며 세계는 그대로다. 그럼에도 인간은 답을 찾으려 한다.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답을 찾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진다. 살아내게 되고 연명하게 되며, 그 연명 속에서 잠시 세계를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들을 모아 삶이라 부른다. 이것은 희망도 체념도 아니다. 그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록이며, 아마 우리가 끝내 벗어나지 못할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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