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 『너무나 많은 여름이』
놀이공원, 좋아하세요?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으로 말입니다. (뒤표지 中)
‘그러니까 놀이공원의 안내지도는 사랑에 빠진 청춘들을 위한 것이었다.’ (44쪽)
슬슬 어묵과 군고구마가 당기는 계절이 다가옵니다. 언제 더웠냐는 듯 계절은 어느새 가을 한복판에 서 있네요. 최근에 서평 한 《바깥은 여름》에 이어 이번엔 김연수 작가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읽어봤습니다.
한창 쌀쌀한데도 여름을 대주제로 지은 소설이 자꾸만 손에 잡히는 이유는, 역시 여름은 지나고 나서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덥고 축축해서 싫을 땐 언제고, 한껏 푸르르고 화창한 날씨가 이제와 그립네요. 그래도 여름보단 가을이 좋지만요.
김연수 작가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짧은 스무 개의 소설을 묶은 단편소설집입니다. 이야기 하나씩 가볍게 읽기 좋을 것 같아서 최근 제주 여행과 함께 했네요. 각 단편들은 김연수 작가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열리는 낭독회를 위해 썼는데요, 소설의 뒤편엔 이야기와 어우러져 함께 들어도 좋을 노래가 소개돼 있습니다. 낭독회에서 낭독 사이사이에 곁들인 노래를 수록했다고 하네요.
어떤 이야기는 제게 위안을 주고, 또 어느 것은 가르침을 주기도 하는데요. 스무 편 모두 참 좋았습니다. 그중에서 가르침을 주었던 단 하나의 이야기를 고르자면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입니다. 놀이공원에서 대화하는 재결합한 연인 ‘재연’과 ‘지수’의 감정선을 짧은 서사 속에 명확히 그린 단편입니다.
1.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
노래, ‘Sunset Rollercoaster, Bomb of love’를 곁들여.
해가 저무는 시간, 점점 사람들이 빠져나갑니다.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하늘은 검게 물들겠지만, 아직은 푸른빛입니다. 지수는 ‘재연이 아니었다면 평생 오지 않을' 정도로 놀이공원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인파에 밀려 싫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또 기대한 만큼 재미가 없기 때문이네요. 그래서 '조금 더 놀다가 가자'는 재연의 말에 지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집니다.
재연은 놀이공원의 안내판을 보며 아직 가보지 않은 데가 너무다 많다며, 전부 가보자고 이야기합니다. 나무판의 안내지도엔 모두 ‘25개의 어트랙션, 23개의 엔터테인먼트, 16개의 주토피아, 1개의 공원’이 그려 있습니다. 지수의 눈엔 안내판이 세상의 지도인 양 광활하게만 보이는데요. 지도에 빠진 게 있다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놀이공원에는 저런 것들만 있는 게 아니잖아. 25개의 보어덤과 23개의 디스어포인트먼트와 16개의 다크니스 같은 것들도 있다고 봐야지. 보어덤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지루한 시간들을, 디스어포인트먼트는 기대한 만큼 재미가 없는 쇼를 끝까지 봐야 할 때의 실망감을, 그리고 다크니스는 인파에 밀려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의 캄캄한 마음을 뜻하지. 그것들은 놀이공원의 숨겨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어.” (40쪽)
‘다시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해야’한다고 지수는 생각합니다. 지수의 말에 재연은 화내는 대신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수에게 ‘원래 나는 놀이공원에 가는 걸 싫어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갔었는데, 엄마가 보기에 재연은 별로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지수는 놀이공원에 간 첫날에 너무나 신나게 놀았다고 회상하는데, 엄마는 전혀 다르게 기억했네요.
재연은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런 것’이라며,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어서 안 좋은 기억들은 싹 지우는’ 거라고 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지수에게 헤어지고 나서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네가 잘못한 일' 뿐이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가 잘못한 일이 더 많더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건 아주 좋았던 시간들이었어. 그러다가 나는 어떤 꿈에 대해 생각했어.”
(…)
"눈을 뜨고 꾸는 꿈. 물고기의 꿈. 혹은 청춘들이 생각하는 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어떤 일이 하고 싶은 소망.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랑이든 명예든 돈이든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되는 일. 하지만 자유이용권이 손에 있어도 지루한 시간과 실망감과 캄캄한 심사만을 맛보고 있는 거지. 그런 것들을 참아야만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처럼. 그런데 이건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라 꿈에 대해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홈쇼핑에서 ‘꿈’이라는 상품을 출시한 기념으로 반값에 팔기에 주저하지 않고 구입했다가는 사용해보지도 않고 반품하는 사람처럼." (43쪽)
이에 지수는 사람들이 단순히 '포장지'에 속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이야기하는데요. 거기에 재연은 이야기를 덧붙이고, 지수 또한 대화를 이어나갑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주문한 건 포장지가 아니라 그 안에 든 물건이고, 나아가서는 그 물건을 사용하는 시간들이잖아. 뜯어보지도 않고 반품한다는 건 포장지를 반품한다는 소리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네 말은 자유이용권을 손에 쥐고 지루함과 실망감만 즐기고 나갈 수는 없다는 뜻이잖아. 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데, 조금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내 머릿속의 지우개도 잘 작동하겠지. “
"그게 아니야. 네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으면서 판단부터 내리며 헤어지자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이야. 놀이공원에서 조금 일찍 나간다고 해서 나쁜 기억으로 남을 리는 없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한에는. 이제 나가자." (44쪽)
지수는 재연만 있다면 실망스럽고 캄캄하기만 한 놀이공원 데이트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연 또한 지수가 지루해한다면 좋아하는 놀이공원을 제쳐놓고서라도 당장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놀이공원의 안내지도는 결국 '사랑에 빠진 청춘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이렇게 말하며 소설을 끝냅니다.
'자유이용권이 있다면 자유롭게 이용하기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순간을 불평하면서 보내지 말고. 혹시 그런 마음이 든다면, 사랑이든 일이든 꿈을 가져보기를. 꿈이 없는 사람의 자유이용권은 25개의 보어덤과 23개의 디스어포인트먼트와 16개의 다크니스를 맛보는 티켓에 불과할 테니까.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다른 불순물 없이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45쪽)
2. 그래서, 놀이공원, 좋아하시나요?
저는 조금은 무미건조한 사람이라, 놀이공원을 아주 좋아하진 않습니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 놀이공원에서 보낸 시간들은 모두 빛나는 추억이 되었지만, 재연의 말대로 머릿속 ‘지우개’가 작동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지수처럼 수많은 인파에 밀리고,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더러 두세 시간까지 기다리는 건 참 힘든 일이라고 느낍니다.
제게도 줄이 너무 길다고, 다리가 아프다고 짜증 내던 순간이 분명 있었습니다. 놀이공원을 온전히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참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요. 똑같은 거리를 걷고 함께 줄 서 기다리는데도, 방긋 웃기만 하는 사람도, 한없이 찡그리기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는 비단 '놀이공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놀이공원에 가든, 등산을 하든, 바다를 보든, 그 무엇을 하든 간에 소중한 사람과 함께라면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즐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선 '꿈'도 가져야 할 테지요.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니까. 주어진 상황을 즐긴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꿈을 오롯이 꿀 수 있지 않을까요. 불평 불만 할 시간에 옆사람 얼굴 한번 더 보고 웃으면 되지 않을까요.
참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든 단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