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은 악취미였다.
나는 불행한 기억을 사랑했다. 불행에 집착했다. 마음속 보석함에 불행한 기억을 모았다. 내 사랑은 악취미였다. (『치치새가 사는 숲』, 80쪽)
1. 폭력의 폭력성
저는 소설을 고를 때 미리 정해두지 않고 그날 기분에 따라 눈에 띄는 책을 사는데요, 그때 표지가 참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애초에 작가도, 책의 내용도 잘 모르는 상태라면 더더욱 표지가 매력적인 책들에 손이 가더군요. 물론 막상 읽었을 때 제 취향이 아니면 조금 실망하기도 하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표지가 예쁘면 손도 잘 가고 왠지 내용도 한층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치치새가 사는 숲』 또한 그랬습니다. 밝고 초록초록한 표지에 눈길이 갔고, 첫 페이지를 읽어봤는데 재밌어 보이길래 골랐습니다. 근데 이게 웬걸… 이 이야기의 주된 줄기는 '폭력'입니다. 그것도 아주 더럽고 역겨운 형태의 폭력입니다.
이 소설은 자신을 지켜주고 보듬어줘야만 했던 어른들의 무관심과 성폭력, 그리고 주변 아이들의 학교폭력으로 점철된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어른이 된 '나'와 그녀가 회상하는 소녀 시절의 '나'의 기억이 끊임없이 혼용되고 결합되며, 왜곡된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에 당했던 폭력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본인에게 너무나 폭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진실을 외면합니다. 성폭력을 행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구해냅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폭력에 관한 소설인 만큼이나 기억에 관한 소설이다. 삼촌의 성폭력이나 '치치림'의 유래에 대한 기억이 돌연 회귀하는 것처럼, 기억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난데없이 폭로된다. 기억은 '사물'처럼 실체로서 고정되지 않고 '비-사물'로서 불안정하게 꿈틀댄다. (『치치새가 사는 숲』 추천의 글, 179쪽, 이소(문학평론가))
작가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추한 폭력을 173장의 분량으로 마구 쏟아내기 때문에 읽기 참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럼에도 한자리에서 한 권을 몽땅 읽어냈네요. 그만큼 폭력을 서사로 형상화하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그리고 그 서사를 견인하는 발랄한 문체가 참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또한 작가가 폭력을 안전하게 포장하지 않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장점도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교훈과 진리를 선사하길 원하는 문학이 존재하는 것처럼, 스스로 위악적인 스캔들과 비밀스러운 악몽의 자리에 머무르길 원하는 문학도 존재한다.
(…)
어떤 소설은 정의로운 길보다 더럽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178쪽)
그렇게 『치치새가 사는 숲』은 그녀가 회피하고 싶고, 외면해야만 했던 어떤 트라우마를 그녀 대신 독자가 직면하게 합니다. 주인공의 트라우마는 결국 우리의 트라우마로 치환됩니다. 그녀가 겪은 폭력의 폭력성을 곱씹으면서 말입니다
이 지독하게 불공평한 진실 앞에서 소녀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존재하는 검은 덩어리, '그때 그곳'과 '지금 이곳' 사이의 어두운 균열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왔는지 되짚어 보는 일이야말로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179~180쪽)
2. 명대사
미래를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원인이 결과를 빚는 게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반추하게 하므로. 미래가 과거를 구성하므로. 결과가 원인에 앞서므로. (『치치새가 사는 숲, 45쪽)
나는 불행한 기억을 사랑했다. 불행에 집착했다. 마음속 보석함에 불행한 기억을 모았다. 내 사랑은 악취미였다. (80쪽)
시체 사진 수집은 한 남자의 악취에 불과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실망감이었다. 차장님도 마음이 많이 병들었구나. 테란이 아니구나. 내게도 불행한 기억을 수집하는 마음속 보석함이 있었다. (109~110쪽)
가슴이 자긍심으로 부풀어 올랐다. 내 러브장이 차장님을 구할 것이다. 차장님의 죄를 사할 것이다. 아니, 차장님에게는 죄가 없다! 만약 사랑이 죄라면 우리는 사형수다. 감옥에서 빨간 명찰을 달고 백년해로할 것이다. 한날한시에 죽을 것이다. (164쪽)
열네 살 때 나는 도무지 아는 게 없었다. '사랑밖에 난 몰라.'였다. 나도 아빠처럼 사랑꾼이었다. 언니는 엄마를, 나는 아빠를 닮았다. 그게 내 가슴이 A컵보다 작은 이유였다. (166쪽)
내가 중학생이 되자마자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알선했다. 밥은 공짜인 줄 알아? 엄마의 밥은 공짜가 아니었고 달미 어머니의 밥은 공짜였다. 불공평했다. 자식에 대한 사랑에도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걸까. 어떤 엄마가 자식을 많이 사랑하면 어떤 엄마는 딱 그만큼 덜 사랑하게 되는 걸까. (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