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 (1) 초가을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by 조창

# 1


서른여덟의 남선은 작년 가을을 생각하며 어서 날씨가 풀리기를 고대했다. 그는 한가을을 사랑했다. 바람막이 한 겹으로 맞는 시원한 바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겨울바람은 뼈에 스미고, 여름의 그것은 미적지근하다. 따라서 가을의 바람을 사랑한다. 더욱이, 선선한 가을바람은 연초의 맛을 살려준다.





# 2


그의 꿈은 언제나 둘이었다. 경찰이 되는 것과 시인이 되는 것. 어려서부터 장래희망을 조사하는 가정통신문엔 항상 두 가지의 꿈을 적어 냈다. 남선은 한 가지의 꿈을 적어 내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엔 꿈은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냐고 대답했다. 그렇게 그는 스물다섯에 경찰이 되었고, 서른여덟에 다다르도록 매년 신춘문예에 도전했다. 현대문학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던 그가 소설이 아닌 시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작은 부피로 큰 울림을 주는 것, 좋은 시는 짧지만 강렬하게 심장에 흔적을 새긴다.





# 3


남선은 여태껏 신춘문예에 단 한 번도 당선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시를 썼다. 그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선 세상의 갖가지 소리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수다 소리에도, 공원에서 노부부가 산책하며 나누는 대화에도, 심지어는 범죄자들의 변명을 들을 때도 그는 귀를 기울였다.





# 4


남선은 과거를 떠올린다. 초가을의 어느 날, 첫 당직 근무를 마친 순경 시절의 남선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집으로 향했다. 그는 담배를 태우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자취방 분리수거장 왼편에 있는 작은 흡연장에 들렀다. 당직 근무 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는 순간은 그에게 무엇보다 값진 시간이다.





# 5


그는 흡연장에서 윤영을 마주쳤다. 키가 작고 마른 몸에 짙은 눈썹을 가진, 고양이를 묘하게 닮아 눈길이 가는 여자였다. 당직 근무의 여파로 정신이 흐려서 그랬는지, 그는 윤영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봤다. 적어도 그녀는 그의 이상형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저 아세요?“



윤영은 남선의 시선을 느끼고 경계했다. 초췌한 몰골의 이십 대 남성이 자신을 계속 쳐다보는데 경계하지 않을 여성은 없다.



“죄송해요. 당직이 막 끝난 참이라 너무 피곤해서 멍하니 있던 것뿐이에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남선은 변명하며 사과를 했다. 다만 그는 당직 근무 때문에 피곤했던 것은 맞으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하시는데 그렇게 피곤해 보여요?”



예상외로 돌아오는 윤영의 말은 의문형이었다. 윤영은 곧바로 사과하는 남선의 모습에 어느 정도 경계를 푼 것처럼 보였다.



“아, 저기 중앙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경찰이에요.“



경찰이란 단어가 주는 신뢰감 때문이었을까. 윤영은 더욱 경계를 푼 채 대화를 이어갔다.





# 6


“그럼 제가 사는 동네 지켜주시는 거네요?”


“발령된 지 한 달도 안 된 신입이라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적어도 지금은 제가 이 동네 치안에 별 도움 안 될걸요.“



남선은 엷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에이. 그래도 항상 감사하죠 저희는. 그럼 어렸을 때부터 쭉 경찰이 꿈이셨어요?”


“네, 근데 제가 옛날부터 꿈이 두 개예요. 경찰이 되는 건 이뤘는데 나머지 하나는 아직도 못 이루고 있네요.”


“그 꿈이 뭔데요?”


“시인되는 거요.”





# 7


첫 만남에 꿈까지 얘기하고 있다니. 그들은 계속해서 꼬리를 물어가며 대화했다.



“우와. 낭만 있다. 그럼 좋아하는 시 있어요? 그래도 시인이 꿈이면 외우고 있는 시 하나쯤 있을 거 아녜요.”



윤영은 당돌한 여자였다. 남선은 적잖게 당황했지만, 필사적으로 자신이 외우고 있는 시가 있는지 떠올렸다. 이는 마음만은 문학 소년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였다.



“지금 초가을이잖아요. 제목이 ’가을‘인 시가 있어요. 함민복 시인이 쓴."


”무슨 시인데요?“


”한 줄짜리 시예요.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짧죠? 그래도 너무 좋은 시예요. 가을 타는 느낌을 가장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 같죠. 제가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도 이 시에 있어요. 짧디짧은 말로 사람 마음을 울리게 할 수 있다는 게 참 멋있잖아요. 저도 이런 시를 쓰고 싶네요.“



남선은 재미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 같아 이내 후회했다. 하지만 윤영의 표정엔 생기가 돌았다. 윤영은 이 대화를 계기로 자신이 남선을 사랑하게 됐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되게 … 좋은 시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짧은 데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이런 시도 알고 계시고, 역시 시인이 꿈인 사람은 다르네요.





# 8


남선과 윤영은 조금 더 이야기하다 서로의 이름만을 물어본 채 헤어졌다. 그들은 이 짧은 대화가 운명처럼 그들을 이어주게 되리란 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별거 아닌 만남처럼 보였던 이 순간이 그토록 아픈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