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다를 사랑 하냐고 묻는 다면
매년 3월 말이 되면, 나는 통영국제음악제 관람을 위해 통영으로 내려간다.
2016년부터 이어져 오는 나만의 전통이다. 주요 연주자들의 라인업과 공연티켓이 오픈되는 1월 즈음부터 나의 마음은 온통 통영으로 돌아갈 생각에 달싹거린다. 사실, 음악제는 거들 뿐이다. 나는 통영이라는 도시를 너무 사랑해서 매년 간다. 그것도 봄의 시작, 통영 봉수골에 벚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에.
참고로 나는 웨스트 코스트 출신이다 (아, 저, 그, 인천 출신이다...). 한국의 바다라면 갯벌을 품은 잿빛 영종도 앞바다, 속초의 철없는 파도, 혹은 부산의…맛집이 많은 바다? 정도를 떠올렸던 나에게, 처음 만났던 통영 바다가 선사해 준 생경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가고 싶은 곳 어디라도’
통영과의 첫 인연은, 2016년에 제작했던 자동차 TV광고 캠페인에서 시작되었다. 위의 문구는 당시에 썼던 광고슬로건이다. 뮤지션 혁오와 그의 절친이 경차를 타고 5일간 전국 로드트립을 하며 차량의 안전성과 주행성능을 뽐낸다는 기획 의도의 캠페인.
통영은 로드트립 여정의 6번째 도시였다. 이미 촬영 4일 차에 든 우리는 낮과 밤으로 이어진 촬영과 편집, 포스팅 작업에 많이 지쳐 있었다. 그렇게 고단한 몸과 마음으로 통영의 바다를 만났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멀리 한산도와 몇몇 작은 섬들이 바라다보이는 작은 방파제 위 낚시장면 촬영이 준비되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이곳이 바다가 아닌 줄 알았다. 강인가? 호수인가? 바다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과 파도가 없고, 물결이 잔잔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음악당과 가까운 통영 수륙해수욕장이었다.
‘섬들이 바다를 막고 있어서 그래요’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진 듯, 이곳 바다는 아무런 불만이 없이 고요했다. 옆으로 가만히 누워 언제고 부터 나를 기다리던 섬들과, 그 앞을 흐르는 강같이 조신한 바다가 찰박찰박 등 두드려 주는 곳. 고즈넉한 풍경에 마음이 뭉클해 지면서, 그 순간 나는 통영 바다와 사랑에 빠졌다.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 통영이라 표현한 백석 시인의 시구엔 과장이 없었다. 이 도시에 어찌 그리 많은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짧고 강렬한 하루를 보낸 후, 나는 한 달 만에 휴가를 내고 다시 통영으로 돌아갔다. 바다의 매력에 빠져 흘러 들어간 통영에는 문학, 미술, 음악에 걸친 수많은 예술가와 그들의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어 다시한번 나를 놀라게 했다. 개울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 강구안 뒷골목에 통영 출신 작가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그리고 전혁림 화백의 작품이 가득했다. 이들이 근처 어딘가 선술집과 다방에 드나들며 예술과 삶을 논했을 상상을 하니 허름한 골목길이 꽤나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충렬사 앞에 설치된 시비를 읽으며, 짝사랑한 통영 처녀를 친구에게 빼앗긴 백석 시인의 서글픈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라는 작품 속, 그가 연인 이영도에게 편지를 쓰고 보냈다는 중앙동 우체국도 남아있다. 살아생전 고향인 통영을 너무나 그리워하며 커다란 통영 앞바다 사진을 벽에 붙이고 사셨다는 윤이상 작곡가. 그의 유해는 201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베를린에서 고향 통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에게는 별맛도 없는 충무김밥이 왜 이리 유명한 것인가 투덜거리기도 했는데, 뱃일하는 어부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쉽게 상하지 않도록 반찬과 밥을 따로 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왠지 짠한 마음에 간이 더해졌다. 술을 시키면 싱싱한 해산물 안주가 기본으로 줄줄이 나오는 ‘다찌’한 상을 받아들고 천천히 취해가는 항구의 밤은 나에게 천국과 다름이 없었다.
통영의 마을 구석구석을 탐험하다 보면, 이곳 출신이 아니면서 통영을 사랑해서 눌러앉은 사람들도 종종 만나게 되었다. 세상 예쁜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이자 ‘포에티크’라는 작은 공방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은, 시집간 언니를 만나러 통영에 왔다가 아름다운 바다와 섬, 골목의 풍경에 빠져 이곳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처음엔 그녀가 만든 통영의 일러스트 액자를 온라인으로 주문했었다. 주문한 액자와 함께 도착한 ‘통영을 사랑해 주어 고맙다’는 엽서 속 그녀의 손글씨가 참 예뻤다. 다음 해 내가 가게로 찾아갔을 때 그녀가 통영으로 오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내 통영 사랑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던 것 같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른다. 작년 이맘때 즈음 사장님은, 자신이 만난 통영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멋진 컬러링 북을 출간하기도 했다. 우리 딸이 참 좋아하는 책이다. 그런 사장님이 부럽기도 하고, 참 멋있다. 마음속에 비슷한 풍경을 가진 사람들은 마구마구 응원하고 싶어진다.
프랑스 최고의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셰프님은, 음악당 내의 레스토랑 총괄셰프 자리를 제안받고 통영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바로 한산도 앞바다의 풍경에 마음을 뺏겨 내려올 결심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통영 오월’이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나는 통영에 내려오는 일정이 정해지면 일단 이곳 예약부터 잡는다. 인기가 많아 예약하기가 쉽진 않지만, 일단 성공만 하면 제철 통영 로컬푸드로 만든 어마어마한 요리의 맛과 신선함, 독특함을 경험할 수 있다. 알고 보니 츤데레인 셰프님은 말씀이 많지 않으셔서, 사실 나는 처음에 좀 쫄았다. 더구나 혼자 왔기 때문에 약간 뻘쭘하기도 했는데 조용히 밥만 먹고 가야 하나, 근데 맛은 있네. 라며 오물오물 먹던 도중 그녀로부터 통영에 눌러앉게 된 사연을 듣게 되었다. 다소 무뚝뚝한 말투에 통영 바다를 이야기할 때는 그녀의 눈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도 아주 신이 나서, 맞아요, 맞아요, 정말 멋지죠, 라고 한창 맞장구를 치고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건조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올해는 아들과 함께 갔는데 여전히 무뚝뚝하시고 음식은 끝내준다. 나는 이런 ‘통영 오월‘을 매우 애정한다 (짝사랑이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참 벅차는 일이다. 같은 바다를 사랑한 이유로, 완벽한 타인들을 이 먼 타지에서 만나게 되는 일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나의 통영 나들이가 이어지는 동안 같은 풍경을 사랑하게 된 이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아무런 연고도,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 매년 오는 내 마음도 점점 넓고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이 도시에 대해 더 배우고 사랑하고 싶다.
한산도 앞바다 전망의 호텔 베란다에 철퍼덕 앉아, 제철 도다리쑥국에 밥을 말고 소비뇽 블랑을 홀짝거리는 상상을 한다. 과연, 통영 미륵산자락에 땅콩집을 짓고 재택근무를 실현해 보겠다는 내 야심찬 장래희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돌아가고 싶은 바다, 통영을 떠올리는 일은 언제나 나에게 기분 좋은 몽상 (day-dreaming)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