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 나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분의 책 배경은 유럽이었다. 영화잡지 편집장을 그만두고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의 이야기를 누군가 책으로 내보길 권했다고 했다. 그분은 꺼져가는 기억의 불씨를 살리고 끌어모아 가까스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일생에 한 번쯤은 파리지앵처럼 살아보라고. 꽤 근사하다고. 그런데 나를 사로잡은 건 파리보다 홋카이도였다. 카메오처럼 책 마지막에 쓱 등장했던 일본의 커다란 섬. 그분은 삿포로 영화제에 갔었던 짧은 여정을 메모하듯 기록해 두었다. 그날 밤엔 눈이 내렸다고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고 했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눈이 아주 살풋하게 착륙 중이었다고 했다. 마치 우주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라고 했다. 그 기분의 상상을 고이 접어 저쪽 기억의 서랍 한 칸에 넣어 두었다.
책장을 덮고 수년이 흘렀다. 그동안 난 홍보회사에 다녔고, 잡지 에디터를 했었고, 신문사 기자를 했었다. 그리고 물살에 떠밀려 오롯이 홀로 밖으로 나왔다. 퇴사했다. 퇴직금으로 카메라와 노트북을 샀다. 통장에서 “텅” 소리가 났다. 딸아이는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는 외벌이 가장이었다. 이걸로 뭐라도 해야 했다. 남은 건, ‘자유’ 하나였다. 프리랜서가 됐다. 자유의 몸이 되자 누군가 홋카이도 취재를 도와주지 않겠냐고 했다. 순간 나는 그 ‘우주’가 떠올랐다. 기억의 서랍을 뒤졌다. 다시 책장을 폈다. 흔쾌히 취재에 동행하기로 했다.
1월의 홋카이도는 하얗다. 공항에서 삿포로까지 가는 열차 밖의 풍경은 겨울왕국이었다. 삿포로 시내 길가에는 눈이 허리춤까지 쌓여 있었다. 오후 5시였는데 해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제설차가 시내버스만큼 돌아다녔다. 1월의 삿포로는 눈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매년 2월 초 삿포로에서는 일본 최대 규모의 겨울 축제가 열린다. 오도리 공원과 스스키노 아이스 월드 등에 수십 개의 눈 조각품이 전시된다. 홋카이도 특산품으로 만든 다양한 먹거리가 펼쳐진다. 눈 미끄럼틀, 스케이트, 눈싸움 등 놀거리도 많다. 밤에는 조명이 켜져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영하권의 기온 속에서 도시는 뜨겁게 들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삿포로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만장일치였다. 삿포로 맥주(サッポロビール)는 일본 맥주 역사의 시작이다. 홋카이도 사람들은 무려 1876년부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당시 삿포로 맥주 창업주 세이베이 나카가와(Seibei Nakagawa)는 에도 막부 시대에 독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은 통상 수교 등을 거부하고 있던 때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밀항해 독일 브레멘에서 어깨너머로 양조 기술을 익혀 돌아왔다. 일본의 맥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은 혼자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굴뚝이 인상적이었다. 과거 저 굴뚝에서는 수증기와 함께 맥주의 향기도 같이 올라와 온 도시로 퍼졌다. 진한 몰트 향이 굴뚝으로 올라올 때면 시민들은 “공장에서 맥주를 열심히 끓이고 있네” 등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공장 관계자가 자랑을 시작했다. “삿포로 맥주는 ‘최초’ 타이틀이 많습니다. 현존하는 일본 최초의 맥주이기도 하고, 이 공장은 홋카이도 최초로 국산 벽돌로 지어진 산업 건물입니다. 그리고 삿포로 맥주는 일본 최초의 맥주 TV 광고를 찍기도 했습니다.” 당시 삿포로 맥주 CM 슬로건은 “삿포로 맥주, 남자들의 선택(サッポロビール、男のビール)”였다. 개척 시대 고생한 남성들이 퇴근길에 혹은 집에 가서 한 잔 쭉 들이켜면서 노곤함을 달래도록 유도한 거다.
공장 견학은 무료고,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삿포로 맥주를 시음할 수 있는 ‘Star Hall’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맥주가 있다. 홋카이도에서만 파는 ‘삿포로 클래식’, 100년 전 전통 방식의 레시피로 제조한 ‘개척사 맥주’를 맛볼 수 있다. 그것도 탱크에서 바로 추출해 극도로 신선한 상태로. 맥주 회나 다름없다. 특히, ‘개척사 맥주’는 오직 시음장에서만 마실 수 있는 스페셜 에디션이다. 맥주마다 전용 잔이 있고, 적정 온도와 이상적인 거품 비율(7:3)을 맞춰 따라준다. 맛은? 말해 뭐 해. 끝내줬다.
내색은 안 했지만, 삿포로 맥주를 마시며 나는 ‘개척’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혔었다. 당장은 기분 좋게 여독을 풀어주는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지만, 모호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개척’의 사전적 정의는 ‘거친 땅을 일구어 논이나 밭과 같이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듦’이다. 이미 농사가 잘되고 있는 기름진 땅의 소작농 위치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땅으로 홀로 나온 나는 자꾸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금기를 깨고 새로운 배움과 모험을 선택했던 세이베이 나카가와는 자신의 선택을 얼마나 확신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게 지금일까? 홋카이도의 개척 정신이 담뿍 담긴 몰트 음료가 꿀꺽꿀꺽 넘어갈 때마다 그 신념에 노이즈가 치지직 생겼다. 밖으로 나왔다. 눈은 오지 않았다. 공기는 차갑고 하늘은 파랗게 까맸다.
Jan,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