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들에 바치는 오르골 랩소디

일본 #4 오타루 운하에 흘려보냈다

by 조디터 Joditor

오타루 시내에 도착했을 때 푸른 빛 땅거미가 묽게 퍼지고 있었다. 차갑게 빛났던 태양 다신 따뜻한 가로등이 하늘을 밝혔다. 운하로 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눈이 기척 없이 내려앉았다. 지금껏 본 눈송이 중에 가장 가벼워 보였다. 가로등 아래에서 고개를 들자, 시간은 갑자기 느려졌다. ‘아, 그분이 이야기한 우주가 바로 이거였나!’(<퇴사를 하고 삿포로 맥주를 마셨다> 참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저 멀리 운하 다리 위에서 사람들이 북적였다.


오타루 운하는 지금의 오타루 상황을 상징, 대변하는 듯 보였다. 오타루는 과거 홋카이도 개척의 본거지였다. 삿포로가 개발되기 전 하코다테에 이어 홋카이도 제2의 도시였다. 바다 근처 탄광이 있어 경제적 요충지였다. 도시 곳곳에 은행이 있던 흔적만 봐도 예상할 수 있다. 오타루 상과대학은 홋카이도에서 두 번째로 손꼽는 대학이다.


역사는 흐르고 시대는 변한다. 오타루는 현재 삿포로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는 위성도시 정도다. 과거 오타루의 운하에는 거룻배들이 석조 물류 창고와 해안에 정박한 배 사이를 활발히 오갔다. 홋카이도의 동맥 같은 곳이었다. 그러다 오타루 부두가 개발되면서 그 역할을 점점 잃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은 거룻배 대신 크루즈가 오가고, 로맨틱한 가스등 아래로 전 세계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무음의 눈을 맞으며 살짝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일본 최대 규모의 오르골당이 있다. 본관을 포함해 7곳의 숍이 있다. 본관에만 8만 점이 넘는 오르골을 판매 중이다. 본관에만 있어도 각양각색의 오르골에 취할 지경이다. 본관은 1915년에 지어져 건물 자체로 문화유산이다. 오타루 오르골당은 이보다 앞선 1898년에 문을 열었다. 본관 정문 앞에는 오타루 오르골당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증기 시계가 장승처럼 방문객을 맞이한다. 캐나다 밴쿠버에 다녀온 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이 증기 시계는 세계 최초로 증기 시계를 만든 레이먼드 샌더스가 만들었다. 밴쿠버에 있는 그 증기 시계와 같은 모양이다. 보일러가 만들어낸 증기가 15분마다 멜로디를 연주한다. 마치 태엽 대신 증기로 작동하는 오르골이랄까?


안으로 들어가면 쓸어 담고 싶은 앙증맞은 오르골들이 페이를 유혹한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유리 천사 오르골이었다. 실제로 오타루는 유리 공예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오타루는 과거 청어잡이가 유명했는데, 당시 어부들 사이에서 유리 부표 수요가 많았다. 그러다 청어 산업이 쇠퇴하면서 기존 유리 제조업자들이 실용품에서 예술·공예품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래서 오타루는 지금 유리 공예 성지가 됐다. 2층에는 마치 박물관처럼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오르골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수천만 원에 달하기도 했다. 3층의 ‘이지 오더’ 코너에서는 나만의 오르골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 좋아하는 곡과 파트를 직접 골라 내가 원하는 오르골에 담을 수 있다. 오타루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념품이다.


오르골은 태엽을 감아 저장된 운동 에너지가 실린더나 디스크를 움직이고, 그 위의 금속 핀들이 돌아가며 튕기는 소리다. 역사는 꽤 오래됐다. 최초의 오르골은 9세기 중엽 바그다드의 한 과학자가 물과 기계를 이용한 자동 연주 장치까지 보기도 한다. 오타루 오르골당의 사료에 따르면, 1381년 브뤼셀의 성 니콜라스 교회에 설치된 카리용(Carillon, 많은 종을 음계 순서대로 달아놓고 치는 악기)을 오르골의 원형으로 본다. 큰 원통을 회전시키면서 핀으로 해머를 움직여 종을 치는 원리인데, 한 마디로 대형 오르골이다. 1600년대 유럽 교회 시계탑을 중심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기계식 오르골은 1796년 스위스 시계공 앙투안 파브르(Antoine Favre)가 만들었다. 그전까지 오르골은 귀족과 상인들 사이에서 시계에 넣는 고급 옵션이었다. 한때 오르골은 전성기를 누리다 1900년대 초 축음기가 널리 보급되자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 인물들의 감정과 서사를 상징하는 매개체로 오르골이 하나 등장한다. 영국 민요「Greensleeves」의 멜로디를 처량하고 쓸쓸하게 반복적으로 연주한다. 그 한정된 시간 속에는 기다림과 안타까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힘들었던 과거 등 수많은 애절함이 담겨 있다. 종종 OST 몇 개 트랙은 오르골 버전으로 편곡돼 나오기도 했다. 오르골이 튕겨내는 멜로디만큼 서글픈 것도 없다. 음악이라기보다 지나간 것에 대한 기억 같은 멜로디. 그게 오르골의 매력이 아닐까? 오르골은 낮에 들으면 슬프고, 밤에 들으면 무섭다. 음정의 불균형과 음계의 제한은 파멸되기 직전의 감성을 붙잡는다. 지나간 것을 불러온다. 잠시 다녀간다.


일본 전통 미학 중에 ‘와비사비(侘寂, Wabi-Sabi)’라는 개념이 있다. ‘와비’란 단순하고 비워진 공간을 말한다. 예를 들어 검소하게 정돈된 다다미방 같은. ‘사비’란 자연스럽게 묻은 세월의 흔적이다. 이끼가 낀 돌담이나 낡은 찻잔 같은. 핵심 가치는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고 흠이 있고 불완전하며 절제된 형태에 진정한 깊이가 있다고 본다. 불완전할수록 아름답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다 그런 의미가 있다. 흘려 보내라. 오타루의 오르골들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Ja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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