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aggavisāṇakappo va ekasī

일본 #5 겨울, 비에이에서

by 조디터 Joditor

퇴사 후 한 달이 지났다. 그래서였을까? 밖은 생각보다 더 추웠다. 꼬박꼬박 나왔던 월급 대신 3.3%를 제한 인건비 혹은 10%의 부가세가 붙은 세금계산서가 내 몸값이 될 예정이었다. 난 괜찮을까? 우리 가족은 괜찮을까?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한동안 ‘괜찮을까?’는 쉬지 않고 나를 따라다녔다. 별 수 있나? 그래도 괜찮았다.


겨울, 홋카이도 비에이(美瑛町)로 갔다. 차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나는 다른 세상에 있었다. 내 체중을 오롯이 실은 발걸음에 눈이 뽀드득 부서지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눈이 쌓인 높이에 따라 음계와 박자가 달라졌다. 새하얀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 그곳은 마치 세상의 끝을 마주한 듯 보였다. 하얀 눈의 지평선은 결국 하얀 구름과 엷은 경계선을 두고 만났다. 저 언덕 너머는 지동설 이전의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듯이 저승으로 이어지는 낭떠러지일 것 같았다.


의도하지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비에이는 나에게 뭔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곳에서 목적지는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그냥 걸었다. 무한으로 펼쳐진 설원은 반짝반짝 작은 별처럼 빛나며 모든 걸 튕겨내고 있었다. ‘반사, 돌아가.’ 차가운 속살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얀 도화지 같은 설원에 발자국 한 획이 보였다. 희미하게 휘어진 그 궤적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단호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 발자국 위로 고양잇과 동물 한 마리가 요염하게 꼬리를 흔들며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오버랩됐다. 순간 그 발자국을 따라가 보고 싶은 호기심이 거세게 요동쳤지만, 참았다.


무엇이었을까? 왜 저 방향이었을까? 왜 혼자였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은 누구에게 하는 거였을까? 0dB.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그 발자국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평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때는 왜 갑자기 『숫타니파타(Sutta Nipāta)』의 경전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제1장 세 번째 경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바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저 작은 발자국에서 왜 거대한 코뿔소(무소)의 걸음걸이가 보였을까?


이후로 지금까지 고달픈 삶이었다. 뭐 하나 쉬운 하루가 없었다. 모든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믿었던 이들에게 대차게 배신도 당했다. 빚도 생겼다. 꽤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모든 것은 다 내 책임이었다. 지금은 점점 괜찮아지고 있다.


그래도 너무 힘들 때면 저 발자국이 생각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침묵하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아야지. 누가 뭐라고 해도 중심을 잡고 담대하게 나아가야지. 스스로 행하며 게으르지 말아야지.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집착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자유로워야지. 물에 젖지 않는 연꽃처럼 오염되지 말고 깨끗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꾸준히 가야지. Khaggavisāṇakappo va ekasī.


Ja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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