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파리 종강식

프랑스 #13 내 생애 최고의 숙소

by 조디터 Joditor

파리를 떠나 노르망디 도빌의 어느 작은 마을에 정착한 우리는 본격적으로 쉬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3일간 빌린 집이 신의 한 수였다. 이 집은 크루와 솔리에(La Croix Solier)라는 농장을 운영 중이다. 널찍한 정원에 3층짜리 저택이라 5명이나 되는 우리는 드디어 ‘각방’을 쓸 수 있었다. 방에는 주인아주머니(Florence)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실제로 화가다. 주로 자연과 동물을 그리고, 지금은 옹플뢰르에 갤러리까지 열었다. 실제로 썼을 법한 오래된 가구들이 시골 농장 집의 정취를 완성했다. 1층엔 아담한 거실과 다이닝룸이 있어 매 끼니가 회식이었다. 주인집에서는 웰컴 드링크로 작은 칼바도스 한 병을 두었다. 집주인 어르신 부부는 이곳에서 4대에 걸쳐 칼바도스를 직접 빚어 팔고 있었다. 병 라벨에는 이 집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처음 마셔봤다. 이름이야 어디선가 주워 들어봤지만, 한국에서 칼바도스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칼바도스는 쉽게 말해 사과로 만든 증류주다. 코냑(Cognac)이 프랑스 서남부의 코냑 지역에서 포도로 만든 증류주라면, 칼바도스는 사과가 주원료다. 노르망디 지역은 양질의 사과가 자라기에 제격이다. 대서양과 맞닿아 겨울에 온화하고 여름에 시원하다(도빌이 휴양지로 유명해진 이유다). 비가 자주 오고 습도가 높다. 석회질과 점토질이 섞여 배수성이 좋다. 그래서 뿌리가 얕고 수분에 민감한 사과나무가 뿌리 내리기에 최적이다.


탐스럽게 열린 사과로 시드르(Cidre)라는 사과주를 만든 뒤, 이를 증류해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수년간 숙성하면 칼바도스가 된다. 4년 이상 숙성된 술에는 ‘Vieux Réserve’ 혹은 ‘VSOP’ 라벨을, 6년 이상 숙성된 술에는 ‘XO’나 ‘Hors d’Âge’ 라벨이 붙여진다. 코냑이 디저트와 함께 마시는 고급술로 포지셔닝된 반면, 칼바도스는 보통 식사 전후에 캐주얼하게 즐긴다. 사과 특유의 과실 향이 진하고, 숙성 과정에서 바닐라, 캐러멜, 오크, 견과류 풍미가 더해진다. 당연히 숙성 기간이 길수록 더 부드럽고 깊은 소울이 배어 나온다.


카르푸에서 사 온 6년산 칼바도스를 다 마시고, 주인집에서 두고 간 12년산 칼바도스를 열었다. 초등학교 6학년과 고3의 대결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향긋한 증류주는 처음 경험했다. 우리는 웰컴 보틀마저 싹 비우고 고민에 빠졌다. 시각은 저녁 9시 정도. 주인집 문을 두드려 혹시 칼바도스가 더 있는지 물어볼까 말까 하다 밖으로 나섰다. 주인집은 우리가 머무는 집 바로 옆에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최대한 공손굽실하며 남은 칼바도스가 있는지 물었더니 흔쾌히 곳간을 열어주었다. 그날 주인집에 보관 중인 모든 칼바도스가 동이 났다. 우리는 머물며 마실 것과 한국에 가져갈 것까지 싹쓸이 구매했다.


2차로(?) 3층에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낡은 소파와 의자, 샌드백, 푸스볼 등이 있었다. 딱 봐도 주인집 어르신들의 손주를 위한 비밀 아지트 같았다. 우리도 잠시 (취한 김에) 아이들처럼 둘러앉아 낄낄깔깔 파리에서의 한 달을 갈무리했다. 비록 에펠탑도, 에투알 개선문도, 루브르 박물관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찰나의 파리지앵 삶이 오랫동안 기억될 거라는 걸 알았다. 애꿎은 샌드백을 오랫동안 때리며 “나 복싱에 소질이 좀 있는 것 같아” 그러며 한동안 술기운을 내뱉었다.


다음 날 아침 아직 덜 깬 칼바도스의 여운을 진한 에스프레소로 누르며 집 주변을 걸었다. 멀리 호수처럼 고요한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상륙 작전 같은 건 없었다는 듯. 말 한 마리가 울타리 너머 떨어진 작은 사과를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과를 집어서 주니 냄새를 몇 번 킁킁 맡고, 이내 입술을 뒤집어 까고 커다란 앞니로 서걱 물어갔다. 도빌은 휴양 도시로 성장하면서 경마 도시로 유명해졌다. 도빌 라 토크(Deauville-La Touques)와 도빌 클레르퐁텐(Deauville-Clairefontaine) 같은 유명 경마장이 있고, 여름이면 국제적인 경마 대회도 열린다. 도빌은 프랑스에서 말 사육, 경주마 훈련, 경매까지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어 ‘말의 수도’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어디서든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집에서도 은퇴한 말을 돌보며 숙박객에게 라이딩 체험을 제공 중이다. 돼지나 소처럼 도축될 일도 없고, 여유롭게 사과나 먹으며 넓은 들판을 또각또각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날이 푸석해지는 내 모습과 너무 대조됐다. 다음 생이 있다면, 노르망디 말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이 집 주변을 돌며 문득 House가 아닌 Home의 가치에 관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느덧 부동산으로 돈 좀 벌어보겠다고 아파트를 사고팔면서 제대로 된 Home의 개념을 잊어가는 건 아닌가? 나중에 아이가 성장해 출가한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러한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려서부터 내가 뛰어놀고 몰래 어딘가에 낙서해 놓은 그런 집.


판타스틱한 집에서의 휴양으로 파리 한 달살이를 마무리했다. 파리에서 산다는 건, 프랑스에서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여기에 좋은 사람들까지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천국이다. 다시는 없을, 소중한 한 챕터가 생겼다. 그걸로 되었다.


www.fermedelacroixsolier.net


Sep,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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