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잇다
창문 커튼에서 얼어붙은듯한 소년 제이콥의 눈빛, 그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요?
찰스 키핑의 <창 너머>는 거실 창가에 홀로 거리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을 담은 작품입니다. 석판화를 이용한 강렬한 채색, 번진 효과, 반복되는 수직선을 통해 흐르는 듯한 풍경이 계속됩니다.
<창 너머>에는 바깥을 훔쳐보는 소년의 음울한 표정을 비롯해서, 쭈그렁탱이, 삐쩍 마른 개 등 삭막한 현실의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테인글라스의 빛처럼, 고흐의 거친 붓놀림의 색처럼 강렬한 색상은 계속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창 너머 소년이 바라보는 풍경은 계속 변합니다. 알프네 과자 가게, 짐마차, 사람들에게 침을 뱉는 조지, 갑작스럽게 하늘로 날라 오르는 비둘기, 쭈그렁탱이 할머니와 비쩍 마른 개.. 3인칭 시점으로 내레이션 되던 창 밖 풍경이 책 중반 이후로 갑자기 소년의 1인칭 시점으로 바뀝니다. 갑작스럽게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말은 무섭게 질주합니다. 소년은 슬퍼하며 개를 꼭 안고 가는 쭈그렁탱이의 모습을 유리창에 입김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창 너머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제한적입니다. 모든 정황을 알 수 없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 말이 질주하고, 이후에 축 늘어진 개를 안고 가는 할머니의 슬픈 모습은 갑작스러운 개의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창 너머>에서는 반어법 적인 내용이 가득합니다. 무채색으로 표현해야 어울릴 것 같은 부정적인 현실의 피사체들은 온통 알록달록한 채색으로 아른거립니다. 창문 커튼 사이로 바라본 풍경은 조각조각 몽타주처럼 연결이 되고, 창 밖의 모든 일들은 추측과 상상으로 얼룩집니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은유적인 상상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보다 더 끔찍하고 과격한 상상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 거죠. 우울한 소년의 감정이 현실을 더 몽환적으로 만듭니다. 마치 창에 흘러내리는 그림 속 그림 자욱이 흐르는 피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말이죠.
찰스 키핑은 <창 너머>처럼 도시의 어두운 모습을 특유의 표현방식으로 독창성 있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도 <창 너머> 못지않은 대담한 표현 형식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색을 분리하여 석판으로 찍어 낸 이미지 위에 따로 선을 그려 형태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왁스나 스펀지, 덧칠하기 등을 이용해 여러 가지 시각적 효과를 내기도 했지요. 여러 가지 색과 형태가 번지고 뭉개지는 표현의 '키핑 스타일'은 잿빛 도시의 풍경을 몽환적인 형태로 변환시킵니다. 현기증이 날 듯 울렁거리면서도 꿈속처럼 느껴지는 아련함이 찰스 키핑의 그림의 매력인 것 같아요.
찰스 키핑의 다른 작품 <길거리 가수 새미>와 <낙원섬에서 생긴 일>은 앞에서 소개 한 두 작품과는 달리, 정제된 갈색 톤을 기반으로 특유의 화려한 컬러 사용은 부분적으로 절제해서 표현합니다. 미디어 스타의 이야기를 다룬 <길거리 가수 새미>, 도시 개발로 인한 낙원 섬의 변화를 다룬 <낙원섬에서 생긴 일> 모두 작가의 비판적인 현실에 대한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마냥 부정적인 태도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희망의 깃도 발견할 수 있죠. 찰스 키핑의 독창적이고 강한 스타일은 마치 비주류의 마니아층에게만 인정받을 것 같지만, 영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찰스 키핑>의 드라큘라 삽화를 보면 어두운 세계에 대한 묘사가 탁월합니다. 찰스 키핑이 사랑받는 이유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절망과 어두움이 역으로 빛의 세계의 그리움과 갈망을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눈물과 콧물로 어두운 감정은 토해내야 시원해지는 것처럼, 찰스 키핑은 어두운 현실을 몽환적인 인상으로 만듭니다.
<창 너머>에서 제이콥이 그렸던 창 밖 풍경을 저도 그려보았습니다. 제이콥은 창 너머 보았던 수많은 순간 들 중에서 왜 이 장면을 그렸을까요? 때로는 생각이 멈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들을 접합니다. 바로 소년도 그런 느낌을 갖고 그렸을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