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잇다
기차는 일탈이지만 지하철은 일상입니다. 출퇴근 시간, 몸을 실어야 하는 반복되는 하루의 일부이죠.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스쳐지나가는 시간입니다. 너무 붐비지만 않다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에 지하철처럼 괜찮은 곳도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지하철이 밖에 나올 때는 창 밖의 풍경을 감상합니다. 지하철에서 사람을 관찰하고 이를 그림으로 담아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지하철을 타게 된 보이지 않는 삶의 이야기를 마주해본다면요.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내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쁜 돌멩이와 작은 물고기, 까만 밤 서로의 얼굴을 비추던 하얀 달, 어린 나의 길 위에서는 많은 것들이 반짝였습니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걷는 발걸음은 바빴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지나치며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길 위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주름진 손을, 가지각색의 얼굴을, 다양한 표정의 발을 그림으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이 하나둘 싸히고,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길 위에 있던, 가까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 <나는 지하철입니다> 작가 김효은
<나는 지하철입니다>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시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찰과 상상력의 힘이 돋보입니다. 한 명씩, 두 명씩 지하철 안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빈자리를 착취하기 위한 익명의 경쟁자가 아닌 성실한 삶의 궤적을 갖고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말이죠.
나는 오늘도 달립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일 같은 길을. 어디에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을 싣고 한강을 두 번 건너며 땅 위와 아래를 오르내립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길 마디마디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책의 화자는 지하철입니다. "이번 역은 합정, 합정역입니다." 라며 역 소개를 하기도 하고, 덜컹덜컹 몸을 흔들며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탑승하는 승객을 자세히 관찰하고 반갑게 맞이하는 지하철, 그리고 각자의 사연을 갖고 지하철에 탑승하게 된 사람들. 지하철과 사람들의 만남이 단순히 목적지를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양한 삶이 펼쳐지는 하나의 스테이지처럼 느껴집니다.
각양각색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덜컹이는 지하철의 소리, 역의 안내 방송, 지하철 안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아저씨의 목소리 등 다양한 소리 또한 담겨 있습니다. 또 할머니가 들고 있는 짭짤한 보따리의 냄새, 일곱 살 아들 생일에 사 가는 고소한 치킨 냄새, 하얀 셔츠에 밴 시큼한 땀 냄새까지 책 안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가득합니다.
낡은 구두와 그것을 어루만지는 오후의 햇빛.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가득 싣고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오늘도 우리는 달립니다.
책 마지막에 붙어 있는 별책 스토리북은 책 안에서 다뤄진 인물들의 모놀로그가 담겨있습니다. "나는 정유선입니다" "나는 구공철입니다" 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책 안에 담긴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일상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코디언 형식으로 접히고, 앞면은 그림, 뒷면은 글로 구성하되 인물의 얼굴이 글에서 보이도록 구멍을 낸 아이디어가 작은 독립출판물을 보는 재미를 줍니다.
<나는 지하철입니다>의 표지를 만져보면 지하철 안 스크린 도어 앞에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반들반들하고, 책 제목이 쓰여있는 베이지색 부분은 거칠 거립니다. 표지에도 후가공 처리를 다르게 해서 촉각적으로 다른 느낌을 제공하고 있고, 표지의 작가 이름 또한 지하철의 노선 마크 디자인을 응용했습니다. 이런 작은 디테일들이 무척 고심해서 책을 만들었다는 점을 느끼게 합니다.
학교 다닐 때 제가 지하철과 연계해서 생각해본 스토리는 죽음과 관련 있었습니다. 무거운 삶의 무게와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끈 사람이 지하철을 마주할 때 충동적으로 다가오는 생의 단절과 관련된 욕구. 그 욕구는 사실 죽음을 택하고 싶은 게 아니라 더 삶의 욕구가 강했기에, 그것이 뒤틀려진 환상과 같지 않을까. 무거움을 가볍게, 어지러움을 편안하게, 절망을 희열로 바꾸고 싶은 욕구와 환상, 그리고 그것을 다시 현실을 견뎌내며 마음에 담아두는 작은 판타지 같은 이야기였죠.
언젠가 지하철에서 어른거리는 오후의 그림자와 빛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어서 휴대폰으로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 정해진 움직임으로 오고 가는 지하철 안에서 추상화처럼 너울거리는 빛의 움직임이 신비로왔죠. <나는 지하철입니다>에서 그때 발견했던 오후 햇빛의 따뜻한 초록빛과 그림자를 다시 한번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따뜻한 시선을, 보이지 않는 소중한 이야기들에 귀기울여볼 줄 아는 여유를 누구나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